▲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 ||
이 대통령이 만약 세종시 전투에서 후퇴하게 되면 그 책임 일부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야당으로 향하게 된다. 이는 결국 박 전 대표에게 ‘다음엔 이 대통령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귀결된다. 이 경우 특히 이 대통령은 남은 현안인 4대강 건설과 내년 지방선거에까지 박 전 대표의 ‘협조’를 기대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세종시는 4대강 건설을 위한 페인트 모션이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이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 출구전략 뒤에 숨은 노림수를 따라가 봤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1월 30일 한나라당 최고위원과의 간담회에서 세종시 수정안 문제에 대해 ‘후퇴 시사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여권도 크게 술렁거리고 있다. 여당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세종시 수정안 전면 백지화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사실 여권 핵심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후퇴 시사 발언을 전후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고, 전면 백지화 논의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통령의 발언이 알려지기 전 여권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기자에게 “세종시 문제는 전면 백지화 외에 퇴로가 없다. 일단 추진하는 데까지 하다가 안 되면 물러서는 것으로 조율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청와대와 정부가 마련 중인 수정안에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고 여론도 계속 부정적으로 뜨뜻미지근하게 흘러가자 여권 핵심부에서는 이미 ‘출구전략’을 마련 중이었다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부르짖던 이 대통령이 갑자기 ‘후퇴 시사’ 발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일단 이 과정에서는 이상득 의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등과 같은 여권 원로그룹의 조언이 작동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자원외교에 집중하며 ‘칩거’ 중이던 ‘형님’ 이상득 의원을 밤마다 전화로 찾아 조언을 구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의원은 최근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에게 저녁을 산 일이 있는데 이때 의원들로부터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문제점과 TK지역 역차별에 대해 ‘거친’ 항의까지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이 의원도 대구·경북 지역의 민심을 토대로 세종시 수정안 관철에 대한 ‘재고’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이야기가 당 일각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비록 이 의원이 공개석상에서는 주호영 특임장관 등과 함께 “세종시 원안 수정으로 지방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다”라며 지방을 설득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갈수록 지역여론의 압력에 흔들려 최근에는 ‘원안 고수’로까지 입장이 변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여기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도 사석에서 세종시 수정안 추진에 대한 역풍과 후유증을 우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과연 거국적인 반대가 뻔히 예상되던 세종시 수정안을 자신의 ‘레임덕 우려’까지 걸고 추진할 의사가 있었느냐”며 ‘묻지마’ 추진 배경에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이 대통령이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세종시 수정안 정국을 조성했다는 ‘음모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먼저 이 대통령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4대강 사업의 완벽한 성공’이지 ‘세종시 수정안 관철’이 아니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기에는 2030년에야 최종 완공되는 세종시 건설 문제를 두고 3년 남은 자신의 임기마저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세종시 수정안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는 ‘실용적인 명분’이 작동하고 있다.
사실 4대강 사업은 현재 민주당이 차기 대선을 앞두고 가장 두려워하는 이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 ‘작품’이다. 이미 ‘청계천 학습효과’를 경험한 바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대선이 열리는 2012년에 1차 사업이 완공되는 4대강의 파괴력을 우려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만나는 의원들마다 “지금 4대강 사업을 반대하지만 만들어 놓고 보면 모두들 잘했다며 나를 칭찬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한다는 전언이다. 대규모 토목공사에 따른 경기 부양 효과와 자전거 도로 건설로 인한 문화 분위기 조성 등은 국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되기 때문에 대선 대비용으로 제격인 ‘블루오션’(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 개척을 의미)이다. 반면 세종시 수정안은 현 정권에서는 덕 볼 것이 별로 없고 오히려 충청권과 친박그룹, 야당과 피터지게 싸워야 하는 이른바 ‘레드오션’(피를 흘리며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시장)이다.
▲ 세종시 원안사수 1000만명서명운동 대회. 여론도 ‘수정안’에 대해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 ||
그런데 이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을 전격 백지화한다면 박근혜 전 대표도 그리 ‘만세’를 부를 일은 아니다.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의 ‘몽니’ 때문에 의욕적으로 추진해보려던 국가 중요 정책을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동정적 여론이 형성될 경우 박 전 대표도 그 후폭풍을 감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시 포기를 진두지휘했던 박 전 대표는 수도권 민심의 반발을 불러 영남·충청권의 소맹주 정도로 그 정치적 위상이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여당 내에서도 친박그룹의 계파 수장으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굳어져 당내의 중도파 규합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정국 안정을 구실로 세종시 수정안 문제에서 전격적으로 발을 뺄 경우 박 전 대표는 국가라는 대의를 버리고 충청과 대선 전략이라는 소의를 취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는 향후 대선 과정 때 명분싸움에서 밀리는 기제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대통령 자신도 국가 주요 의제의 추진 실패라는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여권 쇄신론’을 불러올 것이다. 특히 친이그룹은 이 문제와 관련해 ‘이를 갈고 있다’. 이들은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사업이 좌절된 것과 그에 따른 국가적 낭비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며 박 전 대표에게 정면으로 칼을 겨누고 있다. 수도권의 한 친이 의원은 “수정론이 좌절되면 박근혜 전 대표와 당이 깨지는 수준의 전면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더 이상 여당의 유력한 차기 주자가 아니다. 이렇게 여당 수장의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하는데 어떻게 그 여당의 전폭적인 지지로 차기 대선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세종시 수정안 반대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분명하게 물을 것이다”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런 친이그룹의 반발은 조기전당대회 개최 요구로 이어지는 촉매제로 작용할 전망이다. 친이그룹 일각에서는 “조기전당대회를 개최해 친이계가 당을 다시 장악해 박 전 대표가 당을 떠나게 하든지, 아니면 박 전 대표가 당권을 잡아 이 대통령과의 불협화음을 최소화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의원들은 ‘당 대표와 최고위원 경선을 분리하는 당헌 개정을 전제로 박 전 대표가 대표에 단독 출마해 당을 책임지는’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듯 친이그룹이 당 쇄신을 명분으로 세종시 추진 좌절의 책임을 박근혜 전 대표에게로 돌릴 경우 그로서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넘어갈 수 없는 위기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친박그룹 일각에서 제기되는 ‘지방선거 전 조기 부상론’에 힘입어 박 전 대표가 당권을 잡고 세종시 정국 후유증의 해결사로 나설 수 있다. 세종시 후퇴 정국이 결국 ‘숨어 있는’ 박 전 대표를 정국의 전면으로 불러내는 계기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이 대통령도 세종시를 버리는 대신 대선 승리의 징검다리가 될 내년 지방선거의 교두보를 박 전 대표를 통해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국면을 맞을 수 있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세종시 수정안 추진 백지화라는 뼈아픈 후퇴를 맛보게 되지만 이를 통해 박 전 대표를 정권 협력 시스템으로 이끌어내 차기 지방선거 승리를 보장받는다면 결과적으로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온 나라가 세종시 문제에 빠져 충청도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은 별 저항 없이 진행되고 있는 4대강 건설 착공식과 그 너머에 있는 대통령선거를 상상하며 슬며시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