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노무현재단’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정치공작 분쇄 비대위’ 첫 회의를 하기에 앞서 한명숙 이해찬 전 총리가 모두발언을 통해 검찰과 언론에 대한 대응 계획을 밝히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피의사실 공표병’이 또 다시 도졌다며 안팎의 거센 비난을 받는 검찰이지만, “혐의 입증에는 전혀 문제없다”는 표정이다. 한 전 총리는 그러나 “모든 인생을 걸고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와 공작정치에 맞서 싸우겠다”고 맞섰다. 검찰의 출석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한 전 총리는 출석 요청일인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진실을 밝히려면 그 과정 역시 적법해야 한다. 그러나 검찰이 그동안 했던 피의사실 공표와 언론플레이는 명백한 불법”이라며 “그냥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이명박정권 검찰 수구언론의 정치공작 분쇄 및 정치검찰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도 이날 반박자료를 통해 “수사 내용을 흘린 불법 행위자를 처벌하고 한 전 총리에 대한 의혹을 ‘6하 원칙’에 따라 공개해야 해명을 하든 조사를 받든 할 수 있다”며 “검찰이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범죄를 저지르는데 출석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공대위는 이날 피의사실 공표 및 명예훼손 혐의로 각각 검찰과 조선일보사 및 취재 기자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한 전 총리 측이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행위에 유독 반발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쟁점화하면 여론싸움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이란 전략적 판단도 감지된다.
공대위는 특히 ‘곽 전 사장이 양복 주머니에 각각 2만 달러, 3만 달러를 넣고 총리 공관에 들어가 한 전 총리에게 직접 돈을 건넸다’는 등의 구체적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피의사실 유출에 검찰이 개입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한 관계자는 “수사관계자가 직접 흘리지 않고선 도저히 확인 불가능한 내용들”이라며 “법무장관이 직접 국회에서 ‘피의사실 공표 사실이 없다’고 답변하는데도 이런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며 격분했다.
공대위는 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이 한 전 총리 수사 단독보도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도 ‘기획수사’의 증거로 꼽았다. 공대위 양정철 대변인은 “특정 언론에만 수사 상황이 보도되는 과정을 보면, 검찰과 수구언론의 ‘합작 기획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검찰은 수사 내용을 이들 언론에 흘린 사람을 색출해 처벌하고, 국민과 한 전 총리에게 사과와 재발 방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노골적인 ‘편향 수사’ 의혹도 지적했다. 한 전 총리 수사를 담당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한상률 게이트’ 전담 수사팀이기도 하다. 검찰은 미국에 체류 중인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하는 민주당 요구에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할 만큼 구증이 안 되는 사안”(이귀남 법무장관)이라며 늑장을 부리고 있다. 양 대변인은 “한 전 청장은 소환조차 안 하면서 한 전 총리 수사에만 적극성을 띠니 ‘정치적 물타기’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민주당 일각에선 “대응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신중론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폭풍을 경험한 검찰이 ‘정치보복’ 비난에 시달릴 걸 뻔히 알면서 한 전 총리를 건드렸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시간이 갈수록 혐의 사실들이 점점 구체화되면서 “정말 뭔가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말 김민석 최고위원의 불법자금 수수 의혹과 관련해 당 전체가 ‘김민석 지키기’에 나섰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았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권 내부에서는 한 전 총리가 이참에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화하는 게 난국 타개에 해법이 될 수 있다는 묘안도 제기되고 있다. 이번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몰아가 ‘정권심판론’으로 되받아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김진표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제가 한 전 총리라면 출마 선언을 해서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현 정부에 대해 분명하게 표로써 심판해달라고 호소하겠다”며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 이번 사건이 여러 갈래로 나뉜 야권 진영의 재결집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친노 신당인 국민참여당 창당 등으로 내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의 표 분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실제 공대위에는 친노 진영과 민주당은 물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등 야3당과 시민사회그룹까지 참여하고 있어 이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하고 있다.
때문에 한 전 총리 수사는 여권 내부에도 미묘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타도 오세훈’을 외치며 서울시장 출마 의지를 밝힌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아직 수사도 안 받고 결론도 안 났는데, 여론재판식으로 여러 사람을 겨냥하는 것은 후진적인 일”이라며 검찰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원 의원이 이번 수사를 ‘야당의 유력 서울시장 후보 죽이기’로 규정해, 여권 주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오 시장도 결국 ‘한패’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는 분석이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