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 7일 민주당 의총에서 발언하는 이강래 원내대표(맨 오른쪽). 그 옆에 정세균 대표와 송영길 최고위원도 보인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지난 12월 9일 오전 국회 민주당 당 대표실. 이강래 원내대표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박주선 최고위원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방금 전 기자들에게 공개된 최고위원회의에서 박 최고위원이 자신을 공개비판한 데 따른 항의였다.
박 최고위원은 앞서 이 원내대표에게 “말로는 원천무효라면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예산 심사하겠다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 아니냐. 한나라당에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을 원내대표에게 요구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전날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서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했는데도, 아무런 ‘보복조치’ 없이 예결특위를 정상 가동키로 결정한 데 대한 비판이었다.
이 원내대표의 항의를 들은 박 최고위원은 “최고위원으로서 그 정도 의사표시도 못하느냐”고 따졌고, 이에 이 원내대표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먼저 나가보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나갔다.
민주당 지도부 내 파열음이 심상찮다. 대여 투쟁전략의 방법론을 둘러싼 갈등이 1차적 원인이다. 강경파와 온건·협상파 간 갈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미디어법, 세종시, 4대강 살리기, 예산협상 등 쟁점현안마다 해법을 놓고 격돌하고 있다.
특히 이 원내대표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강경파 초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협상 우선’에 방점을 찍고 있는 이 원내대표의 리더십에 깊은 회의감이 퍼지고 있는 것. 최근 벌어진 ‘이낙연 파동’은 이를 잘 방증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 12월 14일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에선 4066억 원의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예산’이 통과됐다. 주역은 다름 아닌 민주당 소속의 이낙연 위원장. 이 위원장은 여야를 적극 중재하며 처음으로 여야 합의에 따른 4대강 예산 통과를 이뤄냈다.
민주당은 발칵 뒤집어졌다. 4대강 예산 통과 저지를 위해 당 전체가 총력전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이적행위’였기 때문이다. 지도부도 “당이 이렇게 가면 안 된다” “당의 투쟁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강한 유감을 드러냈다. 비록 둑 높이기 예산 가운데 700억 원을 삭감하는 ‘부대의견’이 첨부됐지만, 양해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이 위원장이 원내 지도부와 ‘사전교감’이 있었음을 항변하고 나선 것이다. 다음날인 15일 밤 국회에서 열린 의원 워크숍에서 이 위원장은 신상발언을 통해 “선배·동료 의원들에게 송구스럽지만, 예산안 의결은 지도부와 상의하에 이뤄진 것이다. 결코 저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동료 의원들의 줄기찬 비판 끝에 나온 해명이었다.
사실이었다. ‘4대강 예산도 삭감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자는 판단에서 내려진 ‘이강래표 전술’이었다. 원내 핵심관계자는 “한나라당이 4대강 예산 밀어붙이기에 나선다면 물리적으로 열세인 민주당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럴 경우엔 예산 삭감을 끌어내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며 “‘4대강 예산은 한 푼도 깎을 수 없다’는 여권의 원칙을 허물어뜨리자는 게 이 원내대표의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에 대한 비판 논평을 냈던 우제창 원내대변인도 “사실은 내가 악역을 맡았던 것”이라며 양측 간 사전교감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론은 ‘4대강 예산 삭감’ 사실에 별 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당이 강경파와 협상파 간 내홍을 겪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 최고위원은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4대강 원천봉쇄’니 하는 얘길 꺼내지도 말았어야 한다”며 “우리 처지가 우스워졌다”고 꼬집었다. 한 강경파 의원도 “(이 원내대표가) ‘꾀돌이’라는 별명 때문인지 자기 재주만 믿다가 자기 꾀에 당하는 경우가 많다”며 “항상 ‘나한테 맡겨 달라’고만 말하고 주변 얘길 듣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최근 불화설이 돌고 있는 박지원 정책위의장과 이 원내대표.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정세균 대표의 행보도 문제가 되긴 마찬가지다. 최근 ‘생활정치’ 선언 이후 민생현장을 둘러보는 것을 놓고 당 일각에선 “미리부터 대선유세 연습하는 것이냐”며 시선이 곱지 않다. 또 원내투쟁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대표가 장외로 돌면서 투쟁동력을 떨어뜨린다는 쓴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박 정책위의장은 이에 대해 “정 대표의 고충은 알지만 주중에는 장외투쟁을 멈추고 원내투쟁에 좀 더 매진해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특히, 대여 강경투쟁을 전개 중인 천정배·최문순·장세환 의원 등 의원직 사퇴서를 낸 ‘장외 3인방’은 “언론법 재논의와 4대강 예산 저지를 위해 지도부가 더 강력한 투쟁의지를 밝혀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까지 발표하며 정 대표를 압박했다.
‘정동영 복당’ 문제도 당내 갈등요인이다. 정동영 의원과 가까운 한 최고위원은 “정 대표가 추진하는 통합과 혁신 움직임이 전혀 속도가 나지 않고 그 행보가 답답하다”며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기득권 지키기’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지도부 간 긴장관계의 진짜 이유는 ‘포스트 정세균’을 놓고 진행되는 차기 당권투쟁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당권주자로 당장 이름이 거론되는 이들만 해도 호남권에서는 박지원·박주선, 수도권에서는 천정배·송영길·추미애 등 적지 않은 수다. 급기야 주류 일각에서는 “다음 전당대회에서도 정 대표가 재신임을 받아 유임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등장인물’ 대부분이 현재 지도부에 있으면서 갈등 기류를 형성하는 핵심당사자들이다. 박 최고위원의 앞선 ‘이강래 비토’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당 관계자는 “차기 당대표의 경우 총선과 대선이 잇따라 치러지는 2012년까지가 임기이기 때문에 경쟁이 그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다”며 “당장 지방선거 공천문제가 본격화되는 내년 초가 되면 전당대회에 대비해 자파 세를 구축하기 위한 이들 간 각축전이 더욱 격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