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안팎에선 박 전 대표가 주장했던 ‘세종시 원안 플러스 알파’의 ‘알파’가 이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카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가깝게는 세종시 정국을 좌우할 ‘충청 여론전’의 히든카드로, 멀게는 대권 승부수로 볼 수 있는 ‘가로림만 프로젝트’의 실체를 따라가 봤다.
“선수를 빼앗겼다.”
지난 1월 11일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고 난 직후 기자와 통화했던 한나라당 한 친박 인사의 말이다. 그는 “박 전 대표에게 여러 현안들을 자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몇몇 교수들이 현재 대기업 유치가 포함된 충청 개발정책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규모로 따지면 세종시 수정안보다 훨씬 클 것”이라면서 “그런데 이번에 정부가 삼성 롯데 등의 대기업 투자를 공개해 다소 김이 빠진 측면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반면, 또 다른 친박 관계자는 “경선 캠프에서 활약했던 몇몇 측근들을 중심으로 충청지역을 대상으로 한 초대형 사업을 준비 중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것이 공개될 경우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초라해질 것”이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 전 대표 주변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충청권 프로젝트’는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가로림만 개발 계획과 상당히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두 차례에 걸쳐 기자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는 A 씨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박 전 대표 자문그룹의 일원이기도 한 A 씨는 “처음부터 가로림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 전 대표 경선을 도왔던 지인들과 함께 2012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울 사업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30여 년 전에 고안됐지만 지금 적용해도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이러한 내용들을 박 전 대표 측에 보고했는데 계속 추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박 전 대표로서도 부친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가로림만 프로젝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7년부터 추진했던 행정수도 건설 계획의 일환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행정구역상 충남 서산시와 태안군에 위치한 가로림만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발해 행정수도의 관문으로 만든다는 청사진을 그렸다. 가로림만이 20만 톤급 이상의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췄고 그 배후엔 공업 기지를 조성할 수 있는 넓은 임야가 있어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을 실현시켜줄 최적지로 꼽혔던 것. 또한 수심이 깊고 방파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파도가 안정돼 있어 동양 최대의 항구 건설도 가능할 것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들과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등을 데리고 이곳을 직접 시찰했고 가로림만으로 통하는 산업도로 건설을 그 자리에서 지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항구 건설과 함께 공업단지를 만드는 것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항구와 공업단지가 같이 들어설 경우 수송비를 크게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낙후된 충청과 호남지역 개발도 가능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1억㎡(약 3000만 평)의 토지에 창원공단 10배에 달하는 공단을 조성하고 400만 명이 살 수 있는 거주 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세종시 수정안이 활용 용지 1058만㎡(약 320만 평)에 총 인구를 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 삽교천 담수호도 가로림만 지구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특히 청와대는 가로림만 일대를 ‘경제특구’로 지정해 홍콩이나 싱가포르처럼 독립된 도시국가로 운용할 계획까지 세웠다.
▲ 박정희(왼쪽)과 충남 서산 가로림만 지도. | ||
박 전 대표 일부 측근들이 이처럼 가로림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세종시 정국과 관련해 내부에서 불거지고 있는 자성의 목소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친박으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지난해부터 세종시 원안 수정을 놓고 청와대 및 친이 주류와 대치하고 있는 박 전 대표가 대안은 제시하지 않은 채 ‘신뢰’만 내세울 경우 오히려 그 화살이 돌아올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던 것은 사실이다. 국민들 눈에 자칫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정치인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이 때문에 세종시 원안 고수와 함께 그것을 뛰어넘을 만한 정책도 제시해야 한다는 건설적인 비판이 나왔다”고 털어놨다.
박 전 대표 자문그룹으로 알려진 일부 측근들이 가로림만 프로젝트 검토에 착수한 것도 이 무렵이다. A 씨에 따르면 박 전 대표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진 않았지만 내부의 이러한 의견들을 수집해 보고했고 ‘정책개발’의 필요성에 관해 상당한 교감을 나눴다고 한다. A 씨는 “어차피 대선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청계천 신화와 대운하 공약으로 국민들에게 큰 기대를 줬던 것은 사실 아니냐. 나중에 공약으로 채택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로림만 프로젝트는 지역개발과 동북아허브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사업으로 큰 이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여권 주류 측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기자로부터 가로림만 개발에 관한 내용을 접한 한 여권 관계자는 “박정희식 개발 사업 아니냐. 때가 어느 땐데…. 물론 박정희 향수가 강한 일부 지역에서는 효과가 있겠지만 국민들 대다수가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우리가 추진했던 대운하 사업을 보면 모르겠느냐. 사업성 역시 30년 전에 평가된 것 아니냐. 지금 다시 해보면 달라질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정치권 일각에선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각계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될 경우 세종시 정국의 새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세종시 원안 수정을 둘러싸고 ‘치킨게임’(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이론) 양상을 보이고 있는 친이와 친박이 가장 주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충청 민심’이다. 정운찬 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과 한나라당 지도부들이 잇달아 충청지역을 방문해 주민들에게 수정안의 당위성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 박 전 대표 역시 이 지역 ‘여론’이 돌아설 경우 원안을 고수할 명분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충청 지지도 추이를 매일 체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세종시가 모든 이슈를 삼키는 ‘블랙홀’ 역할을 하면서 향후 국회 일정 및 6월 지방선거까지 정국을 좌지우지할 전망인데 결국 충청 민심의 향배에 따라 수정파와 원안고수파의 명암이 엇갈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조사된 각종 여론조사들을 살펴보면 일단 충청 주민들은 박 전 대표 지지를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민심 설득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인지라 박 전 대표로서는 안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터.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충청 민심이 아직은 싸늘하다는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득할 자신이 있어서 수정안을 내놓은 것이고 결국 주민들도 우리의 진정성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왕 차관’으로 불리는 박영준 국무총리 역시 지난 1월 1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민심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 설 연휴를 전후로 여론이 폭발적으로 바뀌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박 전 대표 측은 정부가 대기업 유치에 따른 고용 효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맞불’ 작전을 구사한다는 전략이다. A 씨는 “여권에서 일자리 문제를 계속 부각시킬 경우 박 전 대표가 불리해질 수 있다. 충청 일부 지역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수정안 지지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그러나 가로림만 개발은 수정안처럼 파격적인 특혜를 주지 않더라도 경제적 이득 때문에 더 많은 기업이 몰려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A 씨는 “이제 더 이상 ‘신뢰’라는 구호만으로 충청 주민들을 설득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데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