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가 18일 국회에 도착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정몽준 대표가 원안 당론 번복에 책임져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 ||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드디어 자신에게로 향하는 여권 주류의 비수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최근 친이그룹이 주도해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강제 당론 채택에 나선 것에 대해 심각한 위기상황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한나라당의 밑바닥 당심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박 전 대표에 대한 친이세력의 전면적인 선전포고라는 것이다.
이런 친이그룹의 올코트프레싱(전면압박) 작전은 친박그룹 일각의 조기전당대회 개최 요구라는 반격으로 이어졌다. 결국 세종시 정국이 한나라당의 당권·권력 갈등으로 번져가고 있고, 이는 분당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여는 첫 페이지로 인식되고 있다. 독기 품은 ‘전사 박근혜’의 강경 대응 막후를 따라가 봤다.
박근혜 전 대표 진영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지금과 같은 지지율 추이라면 물구나무를 서도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그런 ‘여의도 대통령’에게 위기감이라는 단어는 분명 낯설고 역설적이다. 하지만 위기라는 먹구름은 이미 박 전 대표의 머리 위에 몰려와 있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최근 행보에서 바로 확인된다.
그는 새해 들어 세종시와 관련한 입장을 네 차례나 밝혔다. 정치 현안에 대해 평균 나흘 간격으로 소나기 펀치를 날린 박 전 대표의 모습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리고 그 방식도 기자들과의 직접 대면을 통해서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 홈페이지나 ‘대변인’들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택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최근 화법도 공세적이고 전략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박 전 대표가 현재의 세종시 정국을 그만큼 급박하게 보고 있는 데 따른 위기감의 또 다른 표출이라는 해석이 적지 않다. 한 정치 컨설턴트는 이에 대해 “최근 이어지는 박 전 대표의 세종시 관련 발언을 분석해보면 워딩 자체가 그동안의 관망 모드에서 벗어나 상당히 공세적이고 정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의 행보를 비상모드로 전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를 두고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이명박 후보에 대한 강경대응을 주도했던 그의 최측근 J 씨가 본격적으로 재등장했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박 전 대표가 다시 강경파를 불러들였다는 것 자체가 그를 둘러싼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정국의 어떤 배경 때문에 위기감을 느끼며 강경대응을 주도하는 것일까. 먼저 박 전 대표의 이명박 대통령(MB)에 대한 스탠스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계기가 바로 세종시 정국이다. 박 전 대표는 그 동안 이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 사안에 대해 최대한 예를 갖추며 언급을 자제해왔다. 이는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이자 여권의 수장인 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무언의 ‘국정 협력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는 비록 미디어법 정국 등에서 이 대통령과 시각차를 노정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국정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 해왔다.
하지만 이번 세종시 정국에서 박 전 대표의 ‘동반자 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MB가 나를 버렸다’는 인식의 전환을 그의 직접적이고 강한 언행에서 읽을 수 있다. 이대로 굳어져가는 ‘박근혜 대세론’을 깨기 위한 이명박 대통령의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세종시 정국 조성이라고 보고 결사항전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제 박 전 대표에게는 ‘조용한 국정 동반자’로서의 역할이 아닌, 자신의 대권 가도에 최대 걸림돌로 등장한 이 대통령을 그곳에서 치워야 하는 ‘OK목장의 결투’만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가 몸을 낮추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로우키 행보를 최대한 이어가 협조를 해야 하는 협조의 대상이 아니라, 그를 뛰어넘지 못하면 자신의 미래도 없는 권력 투쟁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박 전 대표는 지금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비협조 행보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친박 진영 전략팀 내부에서는 이미 “탈당을 전제로 한 정계개편의 구체적 시나리오에 대한 검토에 들어간 것”(한 친박 인사)으로 알려진다. 향후 국회일정에서 친박 성향 상임위원장들의 당무 보이콧이나 지방선거에서의 철저한 선거 유세 비협조 등의 극단적인 투쟁방식을 구사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세종시 수정안을 친이세력이 계속 밀어붙일 경우 친박 진영도 사실상 분당 수준의 국정 비협조 수순의 ‘벼랑끝 전술’에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4대강 건설 사업(이 정책은 친박 진영이 지금까지 크게 반대하지 않았음)과 선거구제 개편 등의 큰 정치 사안에 대해서도 비협조 모드를 이어갈 경우 이 대통령의 국정 부담은 상당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실상 반쪽 여당이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전 대표의 이 대통령에 대한 인식 전환은 두 가지 정치 사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먼저 친이세력의 세종시 수정안 당론 채택 추진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지난 2005년 ‘친이-친박’ 계파갈등까지 야기하며 힘겹게 이끌어 낸 당론을 통째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립과 직결되는 민감한 부분이다. 친이 주류가 입지가 약한 정몽준 대표를 앞세워 세종시 원안의 당론을 ‘폐기’하고 수정안 당론을 ‘변경’ 내지는 새로운 당론을 만들어내자는 시도 자체를 한나라당에서 ‘박근혜’라는 이름을 지우려는, 사실상 출당 수준의 전면압박 작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 당론 변경 추진을 자신의 원칙정치 자체를 갉아먹으려는 고사작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세종시 수정안 당론은 ‘정치인 박근혜’의 존립 근거 자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 대통령이 수정안을 명분으로 자신의 본질을 왜곡시키려는 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있느냐. 이제 세종시는 박근혜 그 자체가 되었다. 어떤 타협도 없게 됐다. 충청 민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박근혜라는 정치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세종시는 점점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최근 친박 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조기전당대회 개최 논란도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을 ‘적’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지금은 비록 박 전 대표가 조기전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세종시 정국으로 조성된 이 대통령의 ‘음모’를 점차 실감하고 있는 박 전 대표의 정무적 판단에도 변화가 올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그동안 친이계를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제기되던 조기전대가 친박 내부에서도 잇따라 터져 나오는 것 자체가 ‘박근혜의 위기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친이 진영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친박 내부에서마저 조기전대 주장이 나오는 것은 최근의 세종시 정국 흐름을 그들이 그만큼 급박하게 본다는 의미다. 그동안 박 전 대표 측의 주된 생각은 로우키 행보를 이어가며 조용히 대권을 물려받자는 것이었지만, 세종시 정국을 통해 이 대통령의 ‘칼’을 발견한 이상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조기전대를 통해 당권을 잡아야 박 전 대표의 차기가 보장된다는 전략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그동안 친박 진영에서 그 가능성을 애써 부정하던 박 전 대표의 국정 조기부상론을 현실화시켜주는 주요한 동인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에게 조기전대를 통한 당권 접수가 필요해진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만든 세종시 원안 당론이 누더기가 되고 향후의 지방선거에서 수정안이 정국의 초점이 될 경우 그동안 그가 쌓아온 신뢰의 정치가 한꺼번에 무너지게 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세종시 원안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을 느끼고 있는 박 전 대표로서는 차라리 당권을 접수해 원안 관철로 지방선거를 이끌어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진정성을 보여주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그래서 박 전 대표 측 일각에서는 “세종시 원안 추진을 수십 번 약속해 놓고 이를 마음대로 바꾸려는 한나라당 지도부가 있는 한 어떤 공약도 국민이 믿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박 전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더라도 어떻게 표를 달라고 하느냐. (박 전 대표가) 지금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며 조기전대 필요성을 내비치고 있다. 이렇게 친박 진영 일부에서 조기전대에 대한 입장을 바꾸려는 것은 지방선거에서 친이의 수정안이 계속 회자될 경우 그것이 결국 박 전 대표의 대권 가도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박근혜 전 대표는 세종시 정국에서 돌격형 전사로 변하고 있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을 국정 동반자가 아닌 넘어야 할 권력 투쟁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결과의 산물이다. 박 전 대표는 한 손에 세종시 수정안 당론 채택 저지를 통한 원칙주의자로서의 이미지 재각인이라는 방패와, 또 다른 한 손에는 조기전대 추진설 흘리기를 통한 친이 힘빼기라는 창을 들고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명박 vs 박근혜 조기전당대회 2차 방정식
둘 중 하나는 '치명상'
▲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관계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 ||
먼저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이 놓은 ‘덫’에 걸려들 가능성이 있다. 이는 여권 소장파 일각에서 제기됐던 ‘박근혜 대세론이 역전불능 상황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를 정국의 핵으로 불러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상처를 준 뒤 유력한 대권 주자의 지위를 상실하게 만들자’는 아이디어와 무관치 않다. 최근의 돌아가는 세종시 정국을 보면 ‘박근혜 조기 부상론’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는 점도 감지된다. 이는 공교롭게도 ‘당권을 조기에 접수해 지방선거 이후 대권주자로서 확실하게 권력을 잡자’라는 친박 일각의 시나리오와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를 세종시 정국에 대입해 보면 ‘이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을 포기하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박 전 대표에게 지방선거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우고 승리를 이끌어 내는 것’으로 귀결 지을 수도 있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세종시를 내주고 레임덕을 막을 지방선거의 승리를 손에 얻는 최선의 시나리오다. 또한 박 전 대표가 지방선거에서 패하게 되면 이 대통령은 지방선거를 잃게 되지만, ‘박근혜 죽이기’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수겸장이다. 박 전 대표가 쉽게 그 덫에 걸려들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세종시 정국에서 박 전 대표의 조기부상론이 점차 설득력을 얻게 되면 박 전 대표는 알면서도 이 대통령의 덫에 걸려들 수도 있다.
반면 박 전 대표 입장에서는 이 대통령의 ‘덫’을 알면서도 이에 뛰어들어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다. 그가 만약 조기전대를 통해 지방선거에 참여하게 되는 도박을 하게 된다면 정권 심판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상처투성이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부담이 있다. 하지만 원안 관철이라는 정치적 열매를 통해 충청권을 묶고, 영·호남에 비해 표 결집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 수도권에서도 절반의 승리를 이끌어낼 가능성도 있다. 박 전 대표가 일반의 예상을 깨고 전격적으로 조기전대를 수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지방선거에서도 승리하게 된다면 이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려드는 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대통령은 앉아서 집권 2기의 권력 기반을 송두리째 박 전 대표에게 넘겨야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