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 ||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최근 친이세력 일각에서는 ‘세종시 포비아’(Phobia·공포증)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현 상태로는) 세종시 전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고, 박근혜 전 대표가 당을 조기 접수할 가능성만 더 키워준 꼴이 됐다”라는 것이다. 특히 친이세력은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전쟁 승리에 대한 전리품으로 6월 지방선거 공천권 행사에서 더 많은 지분을 얻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박근혜 압박 작전’으로 시작된 세종시 정국 조성이 결국 이명박 대통령 자신의 레임덕 유도탄이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세종시 정국으로 촉발된 여권의 총체적 난국, 그 막후를 들여다봤다.
“이명박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친이세력의 한 핵심 관계자는 세종시 정국에서 여당 주류가 너무 무기력하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당하고 있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위부대격인 친이그룹 내부에서까지 세종시 정국을 이끄는 청와대의 추진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가 여권 내부의 총체적 난국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여기에는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같은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이명박 전도사’가 ‘친박’에 맞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해도 그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황인데, 현재의 지리멸렬한 지도부로는 세종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는 계파적인 시각이 담겨 있긴 하다. 그럼에도 세종시 수정안을 정운찬 총리 혼자에게만 맡기고 당은 들러리로 전락시킨 이 대통령의 전략에 분명 문제가 있다는 데엔 공감대가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 대통령이 점점 세종시 전쟁에서 후퇴의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자업자득’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세종시 전쟁에서 여권이 총체적 난국에 빠져든 결정적 요인은 바로 머리와 다리가 따로 놀고 있는 여당 지도부의 기형적 권력 구조 때문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현재의 정몽준 대표는 ‘계승 대표’라는 꼬리표 때문에 청와대의 핵심 정보 라인에서도 배제된 ‘허수아비 대표’라는 말들이 많다. 최근 그가 장광근 사무총장을 자르려고 했던 것도 장 총장이 청와대 등으로부터 오는 고급 정보들을 정 대표에게 보고하지 않고 ‘독식’한 것이 들통 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에 정 대표는 장 총장을 교체하려 했지만 최근 다시 유임 쪽으로 흐르는 분위기다. 집권 여당의 대표가 자신의 수족과 같은 총장 인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세종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나라당 수장의 정치적 현실이다.
그나마 안상수 원내대표가 친이세력의 ‘대표’로서 세종시 정국을 부분적으로 이끌고 있지만 정 대표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지역구를 둘러싼 구설수가 그의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한나라당의 최고위원 회의를 보면 더욱 친이세력이 몰리는 상황이다. 그동안 친이세력의 ‘대변인격’이었던 공성진 최고위원이 최근의 수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 때문에 ‘발언’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세종시 수정안 추동력을 약화시키는 악재다. 오히려 허태열 최고위원의 반 세종시 발언이 점차 최고위원 회의에서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정운찬 총리에 대해서는 여당 불만이 더욱 높다. 청문회와 세종시 정국에 임하는 그의 정무적 행보를 보고 친이세력뿐 아니라 ‘중립’ 의원들까지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거의 접었다. 차기 대권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정 총리가 어떤 논리와 설득력으로 세종시 수정안을 관철시킬지 점점 의문부호가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최근 정 총리가 한나라당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기로 했지만 대구 지역 의원들이 대거 불참해 반쪽짜리 모임이 됐던 것도 좋은 예다. 물론 ‘정적’이기 때문에 불참은 당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총리가 부르면 의원들이 쪼르륵 달려가는 게 정상적인 것인가”라며 비웃는 여당 인사들을 보면 그가 과연 세종시 전쟁을 이끄는 장수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이런 당·정의 ‘허약한’ 인사들이 과연 이명박 대통령의 하명을 받아 세종시 당론 변경과 입법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까. 친이 인사들마저 이에 대해 점점 ‘아니다’라는 반응이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세종시 수정안의 주체세력이라는 점에서 뭔가 다른 점이 있을까.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청와대가 세종시 전략을 짤 때 박근혜 전 대표의 예상 대응 방안에 대해 헛다리를 짚었다”라고 지적했다.
▲ 왼쪽부터 정몽준 대표, 정운찬 총리, 정정길 실장 | ||
그런데 청와대의 예상과는 달리 정부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기 이전인 지난 1월 7일 박 전 대표가 대구·경북인 신년교례회에 참석하여 ‘원안 고수’ 입장을 강하게 밝히면서 선제공격에 나서자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정치권에 나돈 ‘세종시 문건’ 가운데 박 전 대표가 정부 발표 뒤 즉각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하드랜딩’(경착륙)을 할 것이란 예상이 있었지만, 박 전 대표는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아예 발표도 하기 전 ‘울트라(초) 하드랜딩’을 강행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청와대에서는 박 전 대표의 대응방안 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등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청와대의 ‘헛다리짚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박 전 대표 측과의 충분한 정무 소통로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그래도 집권 여당의 2인자인데 무조건 반대만 하겠느냐’는 안이한 시각 등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이런 시각에 대해 청와대 김해수 정무비서관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A 수석이 박 전 대표에게 사전 보고를 했다는 얘기를 내가 들은 바는 없는데 글쎄… 또 모른다(그럴지도)”라고 밝히면서도 “그런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진정성을 가지고 수정안을 관철시킬 뿐 정략적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당·정·청의 이러한 세종시 수정안 전략 부재는 전쟁의 패배와 함께 친이세력에게 큰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다. 앞서의 친이세력 핵심 관계자는 “세종시 수정안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에 패배를 하게 되면 당이 서서히 박근혜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개헌론 등 중요한 정무 사안에 대해서도 친이세력이 과감하게 치고나갈 수 있는 동력도 약해진다. 박 전 대표의 급격한 부상은 이 대통령의 급격한 추락과 연동된다는 점에서 세종시 패배는 이명박 정권의 레임덕을 조기에 초래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핵심 관계자는 친이세력이 이번 세종시 전쟁에서 친박그룹에 패배하게 된다면 향후의 지방선거 공천과정에도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에 대해 “세종시 수정안의 당론 변경이 확정돼야 4월 국회에서 처리를 확정지을 수 있는데 현재로선 그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는 이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세종시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손 쓸 방법이 없지 않느냐. 언제 대국민 ‘후퇴’ 발표를 하느냐의 문제만 남게 된다. 그 후 당은 어떻게 되겠는가. 현실적으로 조기 전당대회 개최는 무리다. 현 지도부로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이 대통령의 무책임한 세종시 추진에 대한 반작용으로 친이세력의 지방선거 공천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박 전 대표는 막후에서 현 지도부와 조율하면서 공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은 자연히 박 전 대표 쪽으로 넘어가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럴 경우 이 대통령은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는’ 최악의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세종시 수정안 관철 명분도 잃고 지방선거 공천에서도 타의에 의해 공천 균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차기 집권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박 전 대표가 지난 2006년 당 대표로 있을 때 그해 실시된 지방선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효과는 다음 해 열린 대선 후보 경선 때 ‘당심’에서 이명박 후보를 앞서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이번 지방선거 때도 최대한 많은 ‘친박 당원’들을 확보해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보수층 일각에서는 이번 세종시 전쟁으로 여당의 분당 및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멀어지고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이 대통령이 깨끗이 세종시 후퇴를 선언하고 혼란한 정국을 정리해야 한다는 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친이세력 내부에서는 물론 이 대통령의 장외 지원군들도 세종시 후퇴를 외치자 청와대도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전쟁은 당·정·청의 따로 노는 행보 가운데 점점 백기를 드는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쩌면 이 대통령의 ‘아름다운 항복 선언’이 박근혜 전 대표를 ‘역사 앞에 무책임한 죄인’(친이 쪽 시각)으로 낙인찍히게 하는 장기전의 마지막 승부수이지 않을까.
청와대의 세종시 출구 전략
악몽 잊을 ‘삼색 부적’ 준비
그래서 최근 청와대를 중심으로 세종시 수정안 관철 실패에 대한 ‘출구전략’이 다시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의 한 인사는 청와대가 세종시 패배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3가지 무한도전’을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인사는 “이 대통령이 항복 선언을 하게 되면 정치권에서는 ‘되지도 않을 일을 몇 개월 동안 무책임하게 추진하려다 국론분열이라는 국가적 낭비만 초래했다’는 비판이 많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한 반격 카드로 청와대는 6월 지방선거 이후 제헌절을 앞두고 개헌론에 불을 지피고, 해방 65주년이 되는 8·15 광복절(또는 6·25전쟁 60주년)을 전후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최근 이 대통령은 ‘만나는 데 대한 조건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라고 밝힌 바 있음), 그리고 11월 G20 정상회담 개최를 전후해 정국 이슈를 국내 현안에서 ‘글로벌리즘’으로 만들어 세종시 패배의 탈출로를 확보할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청와대의 이런 ‘희망찬’ 대응책에 대해 “청와대의 정국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 같다. 최근 경제 침체 전조가 다시 나타나고 있고, 이 대통령이 만들어 낼 이슈들이 하나같이 서민 경제생활과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성공신화를 너무 과신해 세종시를 밀어붙이다 오히려 차기 권력 박근혜 전 대표에게 일찍 밥상을 건네주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그것이 남은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마지막 출구전략의 대전제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