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급변기 속에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개혁개방’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오고 있다. 북한 당국은 체제 성과 선전을 진행하면서 체제 단속 역시 주문하고 나섰다. 김정은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연합뉴스
필자가 최근 입수한 자료는 지난 5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선에 배포한 일반 간부들 대상 강연제강 자료다. 강연제강은 주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당 간부들 대상 주간 학습을 지칭한다. 참가자는 대학을 졸업한, 혹은 당 세포비서 이상의 직책을 가진 일반 간부들이다. 강연제강 자료는 선전선동부가 일선에 월 단위로 배포하며 각 도당 사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활용된다.
5월 강연제강 자료가 중요한 이유는 당시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이후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내부 분위기 및 당국의 방침과 일선 지도 취지를 엿볼 수 있는 자료다.
5월 자료 제목은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철저히 뿌리 뽑고, 사회에 건전하고 혁명적인 생활 기풍을 확립해 나가자’이다. 제목에서부터 북한당국이 급변기 속에서 ‘내부 단속’에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당연한 현상이지만, 현재 북한 내부는 상당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고 한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 등 최고지도자의 광폭적인 대외 활동을 접한 간부들과 일선 주민들 사이에선 ‘혹시 우리도 중국처럼 개혁개방 등 변화가 오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고 이에 대한 기대 여론 역시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동요를 의식한 듯 해당 자료 서두에는 이렇게 적시돼 있다. “미제를 비롯한 계급적 원수들은 우리 내부에 비사회주의를 조장시켜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흐리터분하게 하고, 안일 해이하게 만들어 사회의 건전한 생활 기풍을 흐려 놓으려고 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허물어 보려고 온갖 비열한 모략 책동을 다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자료 서두에서부터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내부 분위기와 상황들을 다잡고자 하는 노력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리고 당국은 자료를 통해 일선 간부들에게 크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지난 2월 평창올림픽 당시 한 북한 선수가 미국의 패스트푸드인 맥도날드 제품을 포장해 가고 있다. 연합뉴스
두 번째로 당시 회담을 앞둔 미국을 직접 거론했다. 당국은 자료에서 직접 “원수를 잊어버리면 원수에게 죽음을 당하는 길밖에 없다”고 명시했다. 이어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 신천 땅에서처럼 계급적 원수들에 의해 무리 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당국이 말하는 ‘신천 땅’은 1950년 10월 한국전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된 ‘신천군 사건’을 의미한다. 북한은 예전부터 신천군 사건의 주동자를 미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줄곧 반미교육의 사례로 이용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미국과의 회담을 앞둔 입장에서 내부적으로 다시 ‘신천군 사건’을 거론했다는 점은 주시해야 할 부분이다.
세 번째로 당국은 이에 대한 ‘강한 투쟁’을 주문했다. 자료에서 당국은 “사회주의 본태는 한 마디로 집단주의”라며 “이를 막는 세력들을 사회주의의 주요한 적으로 간주하고, 비사회주의와의 전면 대결전을 선포하라”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집단주의를 고수하고 지켜내지 못하면 사회주의는 무너진다”라며 “끼리끼리 밀려다니며 반체제적인 활동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당국은 앞서의 ‘신천군 사건’을 다시 예로 들며 “(주동자들이) 반동 단체를 조직하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군당국과 군인민위원회, 군내무서를 점거하기 위해 책동하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지적했다. 즉, 당국은 간부들에게 현재의 변화 상황을 맞아 주민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이 자료를 종합해보자면, 결국 북한 당국은 최근 변화를 자청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에 따른 고민들 역시 산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북한의 체제 변화 리스크에 대한 경계는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일성 주석은 과거부터 이른바 ‘모기장 이론’을 강조한 바 있다. ‘모기장 이론’이란 외부 세계와 교류가 많아질수록 좋은 문물도 들어오지만, 그에 따른 사회 해악들도 함께 들어오기 때문에 모기장을 쳐서 걸러내야 한다는 김일성의 주창 이론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부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급변기를 맞이했을 때도 앞서의 ‘모기장 이론’을 내세우며 경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전과는 또 다른 급변기를 맞이하고 있는 북한 당국의 만만찮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