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는 지난 5월 22일 6차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하면서 정유사가 국내에 공급하는 석유제품 가격 상한을 재차 동결하고 조정 주기를 기존 2주에서 4주로 확대했다. 앞서 정부는 중동 전쟁으로 유가가 치솟자 3월 13일 최고가격제를 처음 도입해 정유사 공급가 상한을 설정한 뒤 3월 27일 2차 조정에서 유종별 공급가를 리터당 210원씩 올렸다. 이후 4월 10일 3차, 4월 24일 4차, 5월 8일 5차에 이어 6차까지 최고가격을 동결했다.
이에 따라 정유업계가 주장하는 최고가격제 시행에 따른 손실은 최근 누적 4조 원대까지 불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업계는 최고가격제가 시행된 3월 이후 정유사들이 시장가격으로 석유제품을 판매하지 못하면서 주간 기준 수천억 원대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는 실제 현금 유출이나 장부상 적자라기보다 최고가격제가 없었다면 국제 석유제품 가격에 맞춰 국내에 팔거나 수출로 돌려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이 사라졌다는 의미의 기회손실에 가깝다.
정부는 기회손실까지 보전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정유업계가 주장하는 4조 원대 손실은 국제 석유제품 가격과 국내 최고가격의 차이에 국내 판매량을 곱해 산출한 기대이익에 가깝다는 판단에서다. 가격이 올랐다면 수요도 감소했을 가능성이 높아 정유업계 손실 추산을 그대로 보전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다는 논리다.
정부는 최고가격제 손실 보전과 관련해 원가 중심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정유사가 실제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해 손실을 본 경우에 한해 보전하겠다는 취지다. 원유 매입비와 정제비용 등을 따져 손실분을 산정하겠다는 것인데 정유업계가 기대하는 보전 방식과는 차이가 크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산업부가 말하는 휘발유·경유·등유의 유종별 원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정유업은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휘발유·경유·등유만 따로 생산하는 구조가 아니다. 원유 한 덩어리를 투입하면 휘발유와 경유, 등유, 나프타, 항공유, 벙커C유, 윤활유 등이 연속 공정에서 함께 나온다. 특정 유종에 들어간 원가를 따로 떼어 계산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판매가격 역시 특정 유종의 원가를 먼저 산정한 뒤 여기에 일정 마진을 붙이는 방식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휘발유와 경유는 함께 생산되지만 수요와 재고 상황은 각각 다르게 움직인다. 두 제품 모두 인화성이 높은 액체라 별도 저장탱크에서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는데 경유가 팔리지 않아 저장 탱크가 차면 휘발유 생산도 제약받을 수 있다. 휘발유 생산 과정에서 경유도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정유사들이 시장 수요와 저장 여력에 맞춰 유종별 가격을 조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는 “이런 연산품 구조상 휘발유·경유·등유의 원가를 하나씩 잘라 계산하는 방식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며 “부품값에 인건비를 더해 따지는 자동차 등 개별 상품과 달리 원가 산정이 불가능하다. 2010년대 초반 회계사 출신인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 휘발유와 경유의 원가를 따져보겠다며 팔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진작 실패한 경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유업계가 올해 1분기 대규모 이익을 낸 점도 손실 보전 논의의 변수로 꼽힌다. 중동 전쟁 이후 유가와 정제마진이 급등하면서 정유 4사의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5조 9635억 원으로 집계됐다. SK이노베이션이 2조 1622억 원으로 가장 많았고 GS칼텍스 1조 6367억 원, 에쓰오일 1조 2311억 원, HD현대오일뱅크 9335억 원 순이었다. 지난해 유가 하락과 정제마진 약세로 부진했던 정유사들이 올해 들어 실적 반등에 성공한 셈이다. 2분기에는 최고가격제에 따른 국내 판매 손실에도 불구하고 수출 물량과 정제마진 효과로 더 큰 실적 개선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부는 목적예비비 4조 2000억 원을 석유 최고가격제 지원에 배정했다. 애초 월 6000억~7000억 원 수준의 보전 부담을 전제로 짠 재정 여력이다. 그러나 정유업계가 산정한 손실 규모가 3개월 만에 4조 원 안팎으로 불어날 경우 월 1조 원대 재정이 필요해진다. 최고가격제 종료 시점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회손실까지 폭넓게 인정하면 재정 부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증권가도 정유업계가 주장하는 손실보전액을 전액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진호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S&P 상한제 때도 나왔던 얘기지만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기업과 정부가 부담을 나누자는 고통분담 논리가 작동할 수 있다”며 “정유사들이 원하는 만큼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 연구원도 “우선 환급이 안 된다고 가정해 추정치를 낮춰 잡고 있다”며 “2분기 실적이 워낙 좋게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실제로 이 정도 이익을 냈을 때 정부가 손실보전액을 보수적으로 지급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임종세 한국해양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손실 보전 규모가 커지면 결국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부분도 생긴다”며 “현 상황이 비상 국면에 가깝고 국민경제 전체도 고려해야 하는 만큼 전쟁특수를 누리고 있는 기업 입장에서도 고통분담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기업이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정유업계가 정유사들이 가격 통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재고 회계 구조도 있다. 정유사는 재고자산을 취득원가와 순실현가능가치 중 낮은 금액으로 평가하는 ‘저가법’을 적용한다. 유가가 떨어지면 보유 재고의 가치와 제품 판매가격이 함께 낮아져 재고평가손실과 판매마진 축소(역래깅 효과)가 동시에 나타난다. 반대로 유가가 오르면 과거 낮은 가격에 들여온 재고를 높은 가격에 팔아(래깅 효과) 앞선 손실을 만회할 여지가 생기지만 이때 재고자산 장부가액은 취득원가보다 높게 평가할 수 없다.
실제 지난해 상반기 정유 4사는 유가 하락과 재고평가손실 영향으로 정유 부문 합산 영업 1조 5000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정유업계가 이번 최고가격제에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가 상승 국면에서 판가 회복을 통해 손실을 만회해야 하는데 정부가 공급가 상한을 묶으면서 시장가격으로 팔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유가가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며 역래깅 부담이 현실화하는 추세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민생 안정과 물가 안정을 위해 수출 제한, 국내 석유제품 우선 공급, 가격 상한 등 정부 정책에 협조하며 업계가 감내한 부분도 있다”며 “호르무즈 사태가 끝나 유가가 내려가면 고유가 기간에 들여온 원유에서 재고손실이나 역래깅 부담이 생길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손실 보전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정까지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실 보전 기준을 둘러싼 갈등이 향후 법적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쓰오일 최대주주는 사우디 아람코이고 GS칼텍스 공동 최대주주는 미국 셰브론이다. 외국계 주주가 정부의 산정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소송전으로 옮겨붙을 수 있다는 의미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유사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해본 경험이 없지 않다. 손실 보전 기준이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정리되면 이번에도 분쟁 여지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덕환 명예교수는 “국내 휘발유와 경유 가격은 오랜 기간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인 MOPS에 연동돼 왔고 최고가격제가 없었다면 해당 가격이 현실화됐을 것이라는 점에서 정유사의 손실 주장을 단순한 기회비용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다만 정부 재정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손실을 인정하되 나라 살림과 국민 부담을 고려해 정유사들이 일부 양보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만들어줘야 한다. 정유사도 국가 위기 상황에서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는 공로를 인정받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