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숙 전 총리의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정세균 대표(왼쪽)와 정동영 의원. 아래 사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정세균 대표의 모습. | ||
3월 4일 오전 10시 국회 기자회견장. 민주당 광역단체장 후보인 이종걸(경기) 의원, 이계안(서울)·유필우(인천) 전 의원은 매우 격앙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들은 “2002년 ‘노무현 바람’을 불러왔던 국민참여경선제를 지도부가 외면하고 있다”며 여론조사 합산방식을 앞세워 사실상 수도권 전략공천을 검토 중인 지도부를 맹성토했다.
6·2 지방선거가 목전에 닥치면서 ‘게임의 룰’을 둘러싼 민주당 내 논란이 한층 가열되고 있다. 단순히 후보들 간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주류·비주류, 특히 차기 당권을 놓고 대결 중인 정세균 대표와 정동영 의원 간 전선으로도 확대되는 모양새다.
논란은 민주당 텃밭인 ‘호남’에서 시작됐다. 전북도당은 2월 31일 도내 시장·군수 등 기초단체장 후보 공천시 ‘국민 50%’와 ‘당원 50%’ 비율을 기초로 하는 국민참여경선제를 채택하기로 했다. 전남도당도 최근 시장·군수 후보 선출에 대해 국민경선제를 채택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광주에서 시민참여배심원제(배심원제)를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던 것.
이는 정 대표를 위시한 주류가 ‘호남 물갈이’를 위해 야심차게 내놓은 배심원제가 사실상 퇴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배심원제는 전국 차원의 시민사회 및 전문가 그룹에서 선발한 전문배심원(100명)과 무작위로 선출된 유권자가 참여하는 현지 배심원(100명)으로 구성되는 경선 방식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류 측은 배후에 정 의원이 있다고 판단하고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정 대표의 386 측근이자 지방선거기획본부 경선본부장인 최재성 의원은 “정 의원이 국민경선을 하자는 것은 결국 정 의원의 전국 사조직인 ‘정통들’(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을 동원해 그들만의 경선을 치르겠다는 것”이라며 “이번 선거에서 시민공천배심원제를 무조건 도입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지도부도 책임져야 한다”고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지도부도 즉각 화답했다. 3월 1일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광주시장 후보 선출 방식으로 배심원제와 당원 전수조사를 50%씩 반영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던 것. 이는 배심원제를 단순히 ‘컷오프’(예비심사)용이 아닌, ‘파이널’용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남에서의 공천 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제 발로 투표소로 끌어낼 방법이 없다”(당 핵심관계자)는 판단에서였다.
또 기초단체에선 임실, 정읍 등 전북 2곳, 남구 등 광주 1곳, 여수 등 전남 1곳을 비롯해 모두 10여 곳에서 배심원제를 100% 적용하는 등 적용 대상지역을 압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도부 내 호남세를 대변하는 박주선 최고위원 등은 강력히 반발했다. 이들은 “당헌에도 분명히 경선 원칙이 명시돼 있는데 유독 호남에서만 배심원제를 적용하려는 것은 명분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배심원제의 한 축인 전문가 그룹 선발권도 사실상 주류에게 가 있다”며 “그들의 면면을 봐도 주류 측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단체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배심원제 강행에 깔린 정치적 의도를 경계했다.
이 같은 갈등 이면에는 당내 호남 기득권 구도를 허물어 당권 공고화를 꾀하려는 주류 측과 자파에 유리한 경선방식을 고수하려는 비주류 간 경쟁구도가 얽히고설켜 있다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실제 정동영계 등 비주류 진영은 정 대표와 386 복합체인 주류 진영의 ‘월권’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대반격을 준비 중이다. 비주류 의원모임인 ‘국민모임’ 소속 강창일, 장세환 의원 등은 정 대표를 면담하고 공천심사위원회가 386 인사들 위주로 진용이 짜여진 데 대해 강한 비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비주류 측 재선의원은 “만약 ‘불공정한 흐름’이 조금이라도 현실화되면, 의원총회를 소집해 집단적인 대응도 불사할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수도권 광역단체장 후보 자리를 둘러싼 신경전도 본격화되고 있다. 당 지도부가 서울과 인천 등에 전략공천을 하거나 ‘여론조사 50%’를 반영하는 국민경선제를 검토하고 나서자 비주류 측이 지도부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는 ‘완전’ 국민경선을 주장하며 압박에 나선 것. 이는 정 의원이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던 방식으로, “민주당 경선 흥행을 통해 한나라당과 대등한 게임을 치르기 위해선 모바일·인터넷 투표까지 가능한 ‘순도 100%’ 국민경선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종걸 의원과 이계안, 유필우 전 의원 등 3인은 앞서 기자회견에서 “(광역단체장선거 출마를 선언한) 김진표·송영길 최고위원은 경선 원칙을 심의하는 최고위원회에 제척사유가 있다”며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 안팎에서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한명숙 전 총리(서울)와 경기지사 출마를 선언한 김 최고위원, 인천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송 최고위원의 전략공천 가능성에 쐐기를 박기 위함이다. 특히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급작스레 경기지사로 궤도 수정한 것에 대해서도 “친노무현 진영 인사들이 광역단체장 자리를 다 차지하려는 속셈이 아니냐”며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 외에도 김성순 의원과 신계륜 전 의원(이상 서울), 주승용 의원(전남), 양형일 전 의원(광주) 등도 힘을 보태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종걸, 주승용 의원과 양형일·유필우 전 의원 등은 정 의원 측의 측면지원을 받고 있는 후보들로, 당 안팎에서는 사실상 정 의원 측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평가다.
주류 측 핵심관계자는 “이런 행태가 백의종군하겠다는 사람(정 의원)의 모습이냐”며 “‘국민경선론자’라고 말할 때부터 알아봤다”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지도부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크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당 혁신과 통합위원회는 지난 1월만 해도 “광역단체장 후보 경선에서 ‘인터넷 투표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물리적으로 시스템을 가동하기가 불가능하다”며 군색한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4월까지는 어떻게든 후보 선출을 마무리해서 야권연대를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그에 앞서 공천방식을 놓고 주류와 비주류 간 격한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