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해 10월 부산 해운정사를 찾아 주지 스님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
그동안 불교계와 남다른 관계를 유지해 왔던 박 전 대표가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지려 한다는 것이다. 불교계 역시 이명박 대통령이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4대강 사업의 반대 운동에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유력 차기 대권주자인 박 전 대표에게 ‘SOS’를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청와대와 친이계 일각에서는 불교계가 이명박 정부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것과 관련, 그 뒤에 박 전 대표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불교계와 현 정권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다다른 지금, 박 전 대표가 불심 끌어안기에 나선 내막을 따라가 봤다.
지난 3월 23일 장충동에 위치한 한 불교 시설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명진 스님이 폭로한 ‘봉은사 외압설’ 논란의 키를 쥐고 있던 김영국 거사가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었기 때문. 당시 현장에서 만난 불교계의 한 인사는 “씁쓸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이명박 대통령의 ‘업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피해의식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기독교 장로인 이 대통령이 불교계를 홀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태는 잠재돼 있던 불만이 결국 터져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와 함께 있던 한 스님 역시 “역대 어느 정권이 이렇게 종교 편향적인 정책을 실시했느냐. 안상수 원내대표의 발언은 이명박 정부가 그만큼 불교계를 우습게보고 있다는 증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이 대통령에 대한 불교계의 ‘반감’은 꽤 뿌리가 깊다. 지난 2004년 7월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이 대통령(당시 서울시장) 발언이 ‘악연’의 시작이었고, 2006년 6월엔 이 대통령이 축하 메시지를 보낸 한 기독교 행사장에서 “부산 범어사와 통도사, 해인사 등의 사찰은 무너져야 한다”는 말이 나와 불교계가 발끈했던 사례도 있었다. 정권 출범 후에도 불교계와 이 대통령은 대립각을 세웠다. 특히 불교계는 지난 2008년 7월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에 대한 경찰의 과잉검문 사태가 발생하자 서울시청 광장에 불교신자 20만 명을 동원해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는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불교계 여론이 악화되자 청와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언행으로 불교계의 마음이 상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직접 해명하기도 했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신자 수만 놓고 따지면 불교가 가장 많다. 또한 다른 종교에 비해 지도자급 스님의 발언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사찰을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불교계를 위한 특단의 방안을 강구했었다”며 “다만 현 정권이 기독교의 전폭적 지지로 탄생했다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불교계로서는 소외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당시 청와대 실무진들은 불교계 인사 중용, 사찰 지원 등과 같은 불교 우대 정책을 검토했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9월 친이계의 대표적인 ‘불교통’ 주호영 의원이 특임장관에 임명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청와대 내에서 ‘불심 달래기’의 적임자로 가장 먼저 거론됐던 이가 박근혜 전 대표였다는 것이다. 한 친이계 의원은 “불교계 반발이 극심했던 2008년 9월경 청와대의 한 수석이 박 전 대표를 찾아가 불교계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여권의 핵심 관계자 역시 “이 대통령이 사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박 전 대표만이 성난 불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불교계를 상대로 자체적인 여론조사를 해봐도 이 대통령보다 박 전 대표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정권 초반에 불교계와 등을 지게 되면 남은 임기가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경선 이후 소통이 끊겼던 박 전 대표에게 화해 표시와 함께 ‘특사’ 요청을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이 이러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은 박 전 대표가 오래 전부터 불교계와 끈끈한 인연을 맺어왔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가톨릭 계열 학교를 다녔을 뿐 아니라 세례까지 받았으나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고 육영수 여사의 영향으로 불교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지난 2005년엔 대구 동화사 주지 스님으로부터 ‘선덕화’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불교계 역시 박 전 대표의 든든한 지지기반으로 자리 잡으며 그의 정치 행보에 큰 힘이 돼줬다. 한 친박계 의원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불교계에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박 전 대표가 노승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것도 예전의 ‘향수’ 때문인 것 같다. 박 전 대표 역시 불교계 원로들에게 많은 자문을 구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특정 종교에 치우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어 가능한 비공개로 불교계 인사들을 만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청와대로부터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지난 2007년 3월 경남 양산에 위치한 통도사를 방문했을 때 구설에 오른 후 더욱 조심스럽게 불교계와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통도사의 성타 원로스님은 “통도사는 여왕이 탄생한 곳이다. 박근혜 여왕 탄생을 축하한다”고 말했는데, 이 발언이 인터넷과 언론 등에서 뭇매를 맞으며 박 전 대표를 곤혹스럽게 한 바 있다.
조계종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불교계와 좋은 사이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기존의 정치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보통 정치인은 선거철만 되면 표를 의식해 많은 인원을 대동하고 거창한 행사 치르듯 사찰을 방문하는데 박 전 대표는 정말 소수만 데리고 와 조용히 불공만 드리고 가는 경우가 많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점에서 박 전 대표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 박 전 대표 측근들이 불교계 유력 스님들을 방문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고 있어 그 배경에 눈길이 쏠린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의원은 지난 3월 중순 서울의 한 대형 사찰을 비공개로 방문해 두 시간가량 환담을 나누고 갔다고 한다. 박 전 대표 자문그룹에 속해 있는 한 관계자 역시 “3월 말 불교계의 고위 인사와 시국에 관한 대화를 나눈 후 이를 정리해 박 전 대표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러한 친박 인사들의 불교계 접촉에 박 전 대표 의중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평소 박 전 대표는 계파 의원들에게 “종교를 정치에 끌어들이지 말고 불필요하게 만나지 말라”고 강조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 전 대표의 암묵적인 동의 없이 측근들이 불교계 인사들을 만날 가능성은 적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도 이런 박 전 대표 측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전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언론 보도로) 박 전 대표에 대한 ‘정치 사찰설’이 불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심스럽긴 하지만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수소문 중”이라고 전했다. 한동안 ‘휴전’ 상태이던 불교계와 이명박 정부의 관계는 최근 다시 악화일로에 빠져든 모양새다. 올해 1월 ‘4대강 운하개발사업 저지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포 용화사 주지 지관 스님이 경찰관 두 명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위태롭던 동거’에 적신호가 켜졌고, 안상수 원내대표의 ‘좌파 스님’ 발언으로 양측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평가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우리는 할 만큼 했다. 여기서 밀리면 4대강이고 뭐고 없다”는 강경론이 고개를 들고 있어 당분간 불교계와의 대립은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불교계를 찾고 있는 것은 예전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가에서는 현 정권과 불교계의 틈새가 더 벌어진 만큼, 그 ‘반사이익’을 박 전 대표가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란 해석도 적지 않다. 이번 기회에 불교계를 확실한 ‘우군’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여의도의 한 정치컨설턴트는 “박 전 대표로서는 불과 두 달여를 남긴 지방선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대권 경쟁 채비를 갖춰야 하는데, 외연 확대 차원에서라도 불심을 끌어안을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친박계에서는 세종시 정국 이후 ‘침묵 모드’ 중인 박 전 대표가 향후 현안들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현 정권에서 기독교에 비해 불평등한 처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불교계가 박 전 대표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말도 들린다. 불교계가 ‘친불교’ 성향을 띠고 있는 박 전 대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대신 이명박 정부와의 ‘전면전’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불교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말 4대강 반대 운동을 앞두고 지도자급 스님들이 친박계인 L 의원을 통해 박 전 대표와의 회동을 시도했다. 그리고 실제로 박 전 대표를 만나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박 전 대표가 그동안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줬던 불교계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지난해 4월에도 불교계의 숙원사업이던 문화재보호기금법을 발의해 불교 신도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박 전 대표와 불교계의 ‘밀월 관계’를 청와대와 친이계 일각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여권 일부에선 올해 들어 불교계가 현 정권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과 관련해 ‘박 전 대표 측 입김이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내비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친이 의원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박 전 대표는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 아니냐. 따라서 불교계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언행을 신중히 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친박의 한 관계자는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느냐. 안 원내대표가 친박계냐. 먼저 자기 식구 단속부터 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