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17일 오전 법무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 리에서 나라종금 로비의혹 사건 등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특히 노 대통령이 자신의 핵심측근인 A씨와 Y씨가 연루의혹을 받고 있는 나라종금 사건과 관련, ‘정치적 고려없는 수사’를 주문한 데다 노 대통령 발언 바로 다음날인 18일 검찰이 기다렸다는 듯이 국정원 도청사건과 관련해 국정원 직원 및 민간인 3명을 긴급 체포하면서 정치권은 사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더구나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은 19일 “대통령의 측근 범주에 속하는 일부 사람에 대해서도 소문 차원의 좋지 않는 정보가 있어 확인중이다. (비리가 확인된 인사를) 특정 수사기관에 넘기는 것은 적절한 시기에 발표하겠다”는 말로 정치권의 ‘불안’을 극대화시켰다.
한나라당측은 즉각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김영일 사무총장은 19일 “도청사건과 관련해 야당을 겨냥한 표적수사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규택 총무도 “도청의 실체적 진실규명 대신 야당인사 뒷조사를 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수사한다면 국정조사를 하거나 특검제로 갈 수밖에 없다”고 가세했다.
민주당측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라종금사건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A, Y씨는 당당하게 출두 의사를 밝혔지만 같은 의혹을 받고 있는 구주류 중진들은 노 대통령의 17일 발언 이후 비공식적인 행보도 자제하고 있다.
민주당 신주류의 한 핵심인사는 이와 관련, “대북 송금사건 특검법 공포로 민주당 구주류의 불만이 거세지고 야당의 기세가 등등해진 상황에서 구주류가 연루된 나라종금사건과 한나라당이 연루된 국정원 도청사건, 세풍사건의 철저수사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한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청와대측은 이 같은 정치권의 분석에 대해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19일 이 같은 ‘정치권 사정설’에 대해 “(국민적 의혹을) 말끔하게 털고 가자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의 신당 창당 움직임을 포함, 정계개편 논의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정치권 사정설이 등장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정치권 사정이 ‘치밀하게 짜여진 정계개편 시나리오의 신호탄’이라는 관측이다.
이와 관련해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신주류 강경 개혁그룹에서 신당 창당 주장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하면서 정치권 사정설이 제기된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너무나 앞뒤가 잘 들어맞는다”며 “노 대통령 스타일상 정계개편과 정치권 사정을 사전 계획하에 진행중인지 여부는 의문시되지만 노 대통령이 두 가지 모두에 관심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 인사의 말처럼 지난주부터 정치권에서는 정치권 사정과 관련한 각종 의혹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고 정계개편과 관련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민주당 구주류의 한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사정은 여권 인사 한두 명을 사정 수사한 뒤 야당 인사들을 집중 사정, 야당을 흔들고 그 결과로 야당의원 일부를 빼내 여당의 몸집 불리기를 하는 저차원적인 기획사정이 아니다. 이번 여권 사정은 여권 자체의 개편, 나아가 민주당을 허물고 신당을 창당하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다만 현재 청와대와 민주당의 관계를 감안하면 마치 야권 사정을 위해 먼저 여권 사정을 하듯, 민주당 사정을 위해 청와대 혹은 노 대통령 측근인사에 대한 사정이 선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라며 “나라종금 사건이 전면에 부각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노 대통령 측근 인사들에 대한 비리 의혹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수사 주체인 검찰 내부에서도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에 따르면 나라종금사건 관련 A, Y씨는 이미 ‘구 버전’이고 최근에는 청와대의 A보좌관, B비서관, C씨 등이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 그룹들로서 ‘대형주택을 구입했다’ ‘좋은 차로 바꿨다’ ‘기업인들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등의 소문에 휩싸이고 있다. 또 다른 비서관은 벌써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청와대 문재인 수석이 ‘노 대통령 측근 범주 인사의 비리 소문’을 “참여정부 도덕성 훼손 의도”라고 강력 비판하면서도 “현재 조사중이다. 발표될 내용이나 시기가 되면 발표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청와대의 또 다른 핵심 관계자도 “측근 비리와 관련해 여러 곳에서 제보가 들어오는데 처신을 잘하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겠나”며 “나를 포함해 누구든 걸리면 끝이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설치된 청와대 특검반이 노 대통령의 측근 등 주변인사들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하게 되면 다음 수순은 곧바로 민주당이 될 전망이다. 이미 나라종금 사건과 관련해서는 구주류의 핵심인사 3, 4명이 대상에 올라 있다. 나라종금 의혹사건을 폭로했던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에 따르면 보성그룹은 99년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를 위해 최하 1백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 당시 여권 핵심실세(현재 민주당 구주류)들에게 10억∼15억원대의 뭉칫돈을 뿌렸다.
이 사건 연루의혹을 받고 있는 구주류 중진 외 또 다른 구주류 중진도 아직 공개되지 않는 사건과 관련, 비리제보가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진은 그간 구주류 내에서 가장 든든한 재정적 기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당 개혁안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일부 신주류 인사들에 대한 비리 의혹도 일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민주당 구주류들과 신주류 내 수정주의자들이 사정수사에 노출될 경우 민주당은 곧바로 일대 혼란에 빠지면서 사정의 칼을 쥐고 있는 노 대통령 ‘의중 읽기’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이때 민주당 강경 개혁그룹들이 신당창당을 ‘노심’이라고 전하면 민주당은 곧바로 신당창당의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물론 민주당으로 향한 사정의 칼날은 한나라당으로도 돌려질 것이 확실시된다. 당장 국정원 도청의혹사건의 경우 도청의혹을 폭로한 김영일 총장이나 정형근 의원 등은 검찰 수사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
세풍사건 수사도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핵심측근들을 겨냥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일부 인사들은 세풍사건으로 만든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가 이미 드러나 있어 정치적 도덕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한나라당 내 보수파와 왕당파가 수사에 노출되면 소장 개혁파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지면서 정계 개편의 가능성도 커질 수 밖에 없다.
노 대통령이 개혁성향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당을 창당, 17대 총선에서 제1당을 겨냥하고 있다는 분석은 개혁국민정당의 최근 움직임에서 그대로 감지된다. 개혁국민정당은 노 대통령이 자신의 당선 기여도 면에서 민주당보다 앞선다고 보는 정치세력이다.
개혁국민정당의 김원웅 대표는 최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을 무너뜨려야 한나라당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민주당 개혁파가) 개혁이란 미명하에 지역구도에 의지하려 할 경우 17대 총선에서 이들에 대한 표적공천을 해서 상당수가 떨어지도록 하겠다”고 말해 개혁파들의 탈당과 신당 창당을 간접적으로 촉구했다. 이와 함께 최근 민주당 내에서는 청와대의 노 대통령 핵심측근 일부가 이미 6, 7월 신당 창당을 위한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실행에 착수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첫 정치권 사정은 과거 정부처럼 궁극적으로는 정계개편을 겨냥하고 있지만 과거와 달리 ‘여당 허물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칼날은 더욱 날카로울 것으로 보이며 야당 역시 사정의 한파를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