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벙커: 클림트’ 전 작품 이미지]
지난 11월 개관한 아미엑스 전시관 ‘빛의 벙커: 클림트’가 인구 1만5000명의 작은 도시 서귀포 성산으로 관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전시 관계자는 평일에는 500~600명, 주말에는 1500여명의 관람객들이 찾는다고 했다.
[‘빛의 벙커: 클림트’ 전 작품 이미지]
미디어아트 아미엑스(AMIEX) 프로젝트는 프랑스 레보 드 프로방스에서 처음 시작됐다.
2012년 프랑스 남부 알피유 산맥 중심부의 버려진 채굴 광산에 들어선 ‘빛의 채석장’과 파리 11구 지역의 철제 주조공장을 개조해 만들어진 ‘빛의 아틀리에’가 지난 4월 먼저 선보였다.
빛의 벙커는 세 번째 전시관으로 프랑스 외 지역에 만들어진 최초의 아미엑스 전시관이다.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지역(고성리 2039-22)에 축구장 절반 정도인 2975.2㎡(900평) 면적의 벙커안에 만들어졌다.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10m, 5.5m의 높이의 내부에는 따로 좌석이 없으며 느낌 가는대로 바닥에 앉거나 벽에 기대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미지가 투사되는 동안 우두커니 서서 벽면을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 안에서 관객은 자발적으로 움직이면서 무엇을 어떻게 감상할지를 끊임없이 선택하게 된다.
[‘빛의 벙커: 클림트’전 작품 이미지]
[‘빛의 벙커: 클림트’ 전 작품 이미지]
[‘빛의 벙커: 클림트’ 전 작품 이미지]
클림트는 ‘세기말 비엔나(Fin-De-Siecle Vienna)’에서 활동했다. 19세기 후반 빈 예술계는 빈 예술가 협회가 장악하고 있었고 빈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빈 예술가 협회에 속해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은 왕정이 유지되고 있었고 프란츠 요세프 1세의 명으로 만들어진 오페라 하우스, 박물관, 법원 등은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던 빈 예술가 협회는 정부의 예술정책에 영향력을 가하고 동시에 전시를 독점해 상당한 상업적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기준에 위협이 될 만한 젊은 예술가들을 견제했다.
클림트는 폐쇄적인 당시 빈 예술계를 탈피하기 위해 1897년 36세에 “ 빈 분리파(Seccession)’를 만들었다. 분리파들은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는 다수의 분리파가 있었으나, 가장 돋보였던 활동을 펼친 것은 ‘빈 분리파‘ 그룹이었다.
아테제호수에서의 구스타프 클림트 (1094-1906)
베르만 호프만은 그의 저서에서 빈 분리파에 대해 ”반듯하게 장식된 프레임 속의 고상하기 그지없는 ’그들‘만이 볼 수 있는 그림들이 아닌 길거리에 산재하고 일상 속에서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생활속의 예술이 그들이 꿈꾸는 세계“라고 적었다.
김사월 객원기자 hiapril2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