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 핵심인력 유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사진=최준필 기자
양 측 갈등이 수면위로 떠오른 건 지난 4월 30일이다. LG화학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SK이노베이션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와 미국 델라웨어주 법원에 제소했다고 밝혔다. ITC에는 SK이노베이션의 셀·팩·샘플 등의 미국 내 수입을 전면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델라웨어 지방법원에는 영업비밀침해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델라웨어는 SK이노베이션의 전지사업 미국 법인이 위치한 곳이다.
LG화학이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것을 두고 업계에선 ‘초강수’로 평가한다. ITC와 미국 법원의 증거개시 절차와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이다. 증거개시 절차는 정식 변론에 돌입하기 전 소송 당사자가 정보나 자료를 제출·공개하는 법적 의무다. 법원이 요구한 증거를 모두 제출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소송 결과에도 영향이 미친다. 한국 법원에도 같은 절차가 있지만 미국이 보다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산정되는 손해배상액이 막대하다.
LG화학이 승소할 경우 SK이노베이션 입장에선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전기차용 배터리 미국 시장은 현재 중국 다음으로 클 뿐만 아니라, LG화학이 미국 판결을 토대로 유럽 등 다른 국가에도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어서다.
이 때문에 ‘칼’을 갈고 나온 LG화학과 강력 반발한 SK이노베이션은 이날을 기점으로 나흘 동안 입장문 등을 통해 반박과 재반박을 반복했다. 이들은 맞경고와 함께 상대 회사의 사내 문화와 실적 등을 거론하며 날선 비판도 불사했다. 특히 당초 SK이노베이션은 소송 대응만 하는 쪽으로 대응책을 검토했지만, 공개 신경전이 심화되고 동시에 사업 관계사들의 항의까지 겹치면서 LG화학을 상대로 업무방해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강경 대응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사이의 법적 갈등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중계’되는 건 이례적이다. 하지만 지난 2일부터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은 비교적 차분했다. 양 측 입장에 대한 의견은 갈리지만, 갈등이 수면위로 떠오른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반응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사 관계자는 “LG화학은 2년 전 SK이노베이션 측에 내용증명을 보내는 등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제기가 이뤄져 왔다”며 “양 측 감정이 오래전부터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어느 한 쪽도 물러설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번 법적 다툼은 예고된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 LG화학의 시선 “핵심 인력 빼내 성장”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핵심 인력을 빼가는 과정에서 기술까지 훔쳤다고 주장한다.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사업에 공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2017년부터 LG화학 전지사업본부의 연구개발·생산·품질관리·구매·영업 등 전 분야에서 핵심인력 76명을 빼갔고 이 인력들을 통해 기술이 유출 됐다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 인력이 총 500명, 이 중 연구인력은 300여 명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76명이라는 숫자가 적지 않다고 LG화학은 주장한다.
LG화학은 특히 SK이노베이션으로 전직한 직원들의 입사지원 서류에 배터리 양산 기술과 핵심 공정기술 관련 주요 영업비밀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강조한다. LG화학에서의 상세한 업무 내역부터 프로젝트 리더와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한 동료 전원의 실명 등까지 기술돼 있었다는 주장이다.
LG화학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직원 A 씨의 SK이노베이션 입사지원 서류에는 전극 제조 공정 관련 프로젝트 내용이 당시 상황과 배경, 목적, 프로젝트 결과물인 개선 방안과 성과 등이 포함돼 있었다. LG화은 SK이노베이션 입사지원 직원들이 집단적으로 LG화학의 회사 시스템에서 개인당 400~1900여 건의 핵심기술 관련 문서를 다운로드 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를 토대로 LG화학은 2017년 이후 SK이노베이션의 비약적인 성장에 의구심을 내비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 수주 잔고는 2019년 1분기 430GWh를 기록했다. 2016년 말 30GWh와 비교하면 14배나 증가하는 폭발적인 성장이다. 반면 LG화학 수주 잔고는 2016년 34조 원에서 2018년 60조 원, 올해 1분기 110조 원으로 약 두 배 씩 증가했다.
반면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의 놀라운 성장에 비해 연구개발(R&D) 투자금액은 현저히 낮다고 주장한다. LG화학 관계자는 “사업보고서 등을 보면, SK이노베이션의 최근 3년간 연구개발 투자금액은 5775억 원이다. LG화학(2조 6475억 원)의 5분의 1 수준”이라며 “SK이노베이션의 성장이 R&D에서 비롯된 기술력만 있는 게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 SK이노베이션의 시선 “후발주자 발목 잡기”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억측이라고 맞선다. ‘인력 빼돌리기’가 아니라 LG화학의 낮은 처우와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기업 문화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지친 직원들이 SK이노베이션에 자발적으로 지원했고, 회사는 정당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두 회사의 사업보고서를 비교해보면, 지난해 말 기준 LG화학의 전 직원 평균 연봉은 8800만 원, SK이노베이션은 1억 2800만 원이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지난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LG화학 배터리 부문에서 퇴직한 직원은 1000여 명으로 추산되고, 2017년 한 해만 661명이 떠난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76명이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했다는 이유로 인력과 기술 유출을 의심하는 건 지나치다”며 “올해 경력직 채용 경쟁률이 200 : 1에 달할 정도로 치열했는데, 반대로 SK이노베이션에서 LG화학으로 이직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뭘 뜻하겠느냐”고 반문했다.
SK이노베이션은 또 이직한 76명 직원 대부분이 대리‧과장급이라 핵심 기술을 유출할 수 있는 인력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입사지원서에 기재한 업무기술의 경우, 일부 직원이 자의적으로 상세하게 적었으며 이 직원은 결과적으로 채용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연구개발비에 대해선 LG화학이 자사 기준으로 단순 수치로만 비교한 것 일뿐, 사업 특수성을 고려하면 회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SK그룹 차원에서 충분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고 항변한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이 소송을 통해 ‘발목잡기’에 나섰다는 속내도 숨기지 않는다. 30년 전에 시장에 진출한 선발주자 LG화학이 후발주자가 성장세를 보이자 미리 기선제압을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이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하며 수입 금지 등을 요청하고, 이 과정에서 생산 제한과 배상 가능성이 불거진 만큼 업무방해 등으로 맞소송을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양 측 갈등의 끝은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LG화학은 승소를 자신하고 있다. 특히 기술이 유출된 점에 대한 보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이 증거들을 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라 공개가 어렵고, 사실관계 역시 재판 과정에서 가릴 문제인 만큼 공개적인 신경전은 앞으로 벌이지 않을 방침이다.
이에 대해 SK이노베이션 측은 피소를 당한 점만으로도 불필요한 손해나 위험 요소가 드러나게 된 만큼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