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 의장에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과 삼성 출신인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이 들어서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요즘 재계에 나도는 얘기다. 국내 대표적인 재벌 총수들의 모임인 전경련이 삼성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음을 빗댄 표현인 것.
지난 16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정례 회장단 회의. 이날 모임의 스포트라이트는 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이었다. 그 이유는 이 회장이 1년여 만에 전경련의 공식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모임은 실질적인 재계 총수 모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재계 빅3 가운데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구 회장과 정 회장은 최근 들어 전경련과 껄끄러운 관계로 알려졌기 때문에 회의가 열리기 전 이들의 참석 여부도 민감한 화제였다. 그러나 결과는 이 회장을 제외한 두 회장의 불참이었다.
구 회장은 해외 출장을 이유로, 정 회장은 수해현장 방문을 이유로 불참했다. 역시 전경련과 불편한 관계로 알려진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로써 이날 회의에는 국내 10대 재벌 총수 가운데 핵심 세 명이 빠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들 세 명은 모두 최근 전경련, 혹은 삼성과 이런저런 이유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였다. 왜 LG와 현대자동차, 그리고 롯데는 전경련이나 삼성과 불편한 감정을 가진 것으로 외부에 비쳐지게 됐을까.
얘기는 지난 2월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월21일 삼성물산 부회장 출신인 현명관씨가 전경련 부회장에 취임했다. 전경련에선 임기를 다한 김각중 회장 후임으로 이건희 회장을 원했지만, 삼성에서 강력히 고사하자 대안으로 손 회장이 회장직을 맡고, 상근부회장에 삼성이 추천한 현 부회장이 앉게 됐다. 현 부회장이 전경련 상근부회장으로 기용되자 재계에서는 삼성이 향후 전경련을 지원할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손길승-현명관 체제 출범 이후 삼성의 전경련 지원은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일부 전경련 회장단의 ‘오해’를 사기 시작했다. 회장단 안팎에서는 물론 재계 일각에서 ‘전경련이 삼성 편들기’에 나섰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같은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은 지난 6월 초 전경련이 낸 보도자료 때문이었다. 당시 전경련이 발표한 보도자료의 내용은 ‘국내 기업이 외국인 투자기업에 비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것. 당시 전경련은 보도자료에서 “국내 S사는 1999년부터 4년간 법인세로 4조9천억원을 납부했으나 외국인 투자기업인 L사는 7년간 조세감면 혜택을 받았다”며 정부가 순수 국내 기업에 대해 역차별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경련이 지적한 S사는 삼성전자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L사는 LG필립스인 것으로 알졌다. 당연히 LG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회원사의 공통적인 이해를 대변해야 할 전경련에서 왜 특정 회원사의 입장만 두둔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LG는 “전경련이 삼성에 역편향돼 있다”며 강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이 같은 ‘전경련의 삼성 편들기’ 논란의 중심에는 현명관 부회장이 있었다. 현 부회장은 삼성그룹 원로 경영인 출신으로 이건희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 전경련의 실세로 꼽히는 이규황 전무도 삼성경제연구소 출신. 전경련의 수뇌부가 친삼성 인맥으로 구성돼 있는 셈.
▲ 왼쪽부터 구본무 LG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신동빈 롯데 부회장 | ||
LG가 지난 3월 초 정식으로 지주회사 체제를 출범시켰고, SK가 SK글로벌 사태의 여파로 그룹 구조본을 해체하자 재계의 관심이 삼성 구조본에 쏠렸던 것. 삼성만 구조본을 유지한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 부회장의 발언은 지주회사 전환에 앞장선 LG의 입장에선 현 부회장의 간접 비판이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현 부회장의 발언 다음날 해외에서 귀국하던 구본무 LG 회장은 “우리 회사 사람들 중 몇몇은 왜 전경련 회비를 내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로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LG는 월 6천만원의 전경련 회비를 내지 않아 전경련 관계자들의 애를 태웠다.
현대차의 경우는 지난 노사협상 때 전경련과 틀어졌다. 현대차가 임단협을 통해 주5일 근무제를 수용하자 전경련은 “시대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혹평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현대자동차 고위 간부는 “회원사 입장을 대변해야 할 단체가 회원사를 비난하는 성명을 내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전경련 회비 납부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롯데그룹의 경우 호텔 때문에 전경련과 사이가 틀어졌다. 전경련 주관의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서울 총회가 애초 지난 5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스 여파로 이 회의는 8월 중순으로 연기됐다. 그러면서 장소가 호텔신라로 변경됐다. 그러자 롯데호텔은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공교롭게도 호텔신라는 삼성 계열사였고, 현명관 부회장은 호텔신라 사장까지 지낸 경력이 있었다.
지난 8월에 현 부회장이 공정거래위원회의 계좌추적권 연장 방침을 비판한 것도 삼성의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게 재계 일각의 시각. 지난 98년 이후 공정위가 계좌추적권을 발동해 밝혀낸 5건의 부당내부거래 중 2건이 삼성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부과된 과징금 2백3억원 중 삼성이 낸 벌금만 1백69억원으로 83%나 차지했다.
현 부회장은 지난달 정부가 재벌금융사의 의결권 실태조사에 나섰을 때도 “외국에는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재계에선 재벌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될 경우 삼성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삼성과 직간접적으로 첨예하게 이해가 걸린 사안에 대해 현 부회장이 직접 나서자 ‘전경련이냐’ ‘삼경련이냐’는 비판적인 말들이 오가고 있다. 이에 대해 전경련이나 삼성쪽에선 “단순히 어느 기업 출신이냐를 놓고 특정 회원사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치한 발상”이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