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최종건 전 회장, 방일영 전 회장, 김종필 자민련총재 | ||
최 회장의 평전에는 초창기 자본축적 과정에서 정·관계의 인사들과의 교분이 사업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과의 교분이 수출입 쿼터를 따는 과정이나 외국 차관을 따낼 때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교분을 묘사한 부분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일보 방일영 전 회장과의 교분 관계. 지난 58년 겨울 어느날, 최 회장은 극동건설의 김용산 회장 등과 함께 한정식집에서 회식을 가졌다. 문제는 그 자리에서 시중들던 기생이 이 방, 저 방 옮겨다니며 ‘따블’을 뛰다가 걸린 것. 그 기생에게 어딜 뛰냐고 추궁하자 그 기생이 “조선일보 방 사장”이라고 얘기하자 최 회장이 “그래? 그럼 너 이 집에서 제일로 비싼 양주 한병 그 방에 들여보내고 오거라”고 시켰다.
그러자 방일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 최 회장 방으로 인사를 왔고 그러면서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게 되고 친한 사이가 됐다. 방 사장은 59년 최 회장이 한국산업은행으로부터 산업자금 1만달러를 대부받는 데 큰 힘이 되면서 둘은 막역지기가 됐다.
지난 61년 9월 당시 박정희 의장의 수원 선경직물 공장 방문도 최 회장이 권력 핵심부와 교분을 나누는 데 큰 힘이 됐다. 군사쿠데타 직후이던 당시 박정희 의장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통해서 선경직물에 대해 알게 됐다. 김종필은 최종건과 친하던 이병희가 수원방첩대 대장을 거쳐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을 맡게 되면서 이병희를 통해 선경직물을 알게 된 것.
이병희와 김종필은 3공 시절 내내 권력 실세였다. 김종필이 박정희에게 선경직물과 최종건이 “부정축재자도 아니고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공장을 일으켜 자력 성장한 기업”이라고 박정희에게 보고한 것. 박 의장이 공장방문 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경은 만성적인 자금난이 풀리기 시작했다.
방일영 회장과의 또다른 에피소드. 지난 64년 봄, 방일영 사장은 선경산업 사무실에 들렀다. 최종건은 그날 방 사장이 입고온 셔츠를 보다가 국내에 없는 직물인 것을 알고 셔츠 일부를 잘라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방 사장은 “허허! 나 원! 동생이 원하면 그렇게 해야지”하며 남방 셔츠 안쪽의 일부를 가위로 잘라줬다. 그 천을 보고 개발한 것이 바로 폴리에스테르 연신사인 ‘앙고라’였다. 이 제품도 히트를 쳤다. 방 사장은 최 회장이 66년 일본에서 아세테이트 공장건설 차관을 들여올 때도 당시 장기영 부총리를 최 회장에게 소개해주는 등 큰 힘이 됐다.
최종건 회장은 기생이 입고 있던 수입 원단에서 ‘깔깔이’를 개발해내는 등 섬유업계 최고 경영자로서 새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디에서든 얻어냈다. 깔깔이는 60∼70년대 여성들의 여름철 한복과 양장 옷감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최종건 회장의 사업확장은 석유사업 개시에서 멈춘다. 최종건은 69년 선경합섬을 설립하고, 70년 울산 공장을 완공했다. 수시로 울산공장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날 최종건은 공장장 김봉환을 데리고 울산시내로 나갔다.
최 회장은 차를 타고 지나다 어느 건물을 가리키며 “내가 이거 인수해야 되는데”라고 말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석유회사였던 유공 건물을 최종건이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봉환이 “석유회사까지 하시려구요?”하고 묻자 최종건은 “그럼, 이왕 사업을 하려면 석유에서 섬유까지 전부 해야지”라고 당연하듯 말했다.
최종건의 마지막 유업은 워커힐호텔 인수였다. 지난 72년 12월29일 박정희 대통령은 민영화하는 워커힐의 주인으로 최종건을 낙점했다. 당시 워커힐은 잠정적으로 한진그룹으로 넘어가기로 정부 내부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막판에 한진이 매수대금의 20년 분할납입을 요구하자 최종건 회장이 일시불 인수를 선언하고 막판 역전극에 성공한 것.
박정희 대통령도 인수대금 분할논란을 보고받고 “그럼 선경에 매각하시오. 선경의 최 회장은 아무 일이나 성실하게 해낼 사람이오. 그 대신 세계에서 제일가는 호텔로 만들어 달라는 조건을 하나 붙이시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최종건은 워커힐 인수 직후 폐암 진단을 받았다. 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20일 만에 되돌아온 최종건은 73년 7월1일 선경석유주식회사를 설립했고, 그해 9월에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
어느날 문병을 온 방일영 회장에게 “형님 내가 정유공장 돌아가는 걸 보고 죽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털어놨다. 이런 방 회장과의 인연 때문에 워커힐호텔에 방 회장의 지분참여가 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해 11월13일 최종건은 이후락 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큰 아들 최윤원을 불러 동생인 최종현 회장에게 “종현아 우리 윤원이 잘 부탁한다. 그 녀석 이 다음에 크게 될 인물이야. 네가 그렇게 키워줘야 해. 알았니?”하며 ‘유언’을 한다.
이틀 뒤인 11월15일 최종건은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윤원 회장은 지난 200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하지만 최종건 회장의 ‘기대’와는 달리 최윤원 회장은 SK그룹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잠룡’으로 끝냈다.
최종현 회장의 사후에도 최윤원 회장이 그룹 대표로 나서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SK에선 “최윤원 회장의 건강문제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최종건가쪽에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라는 얘기도 일부 흘러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양가를 대표하는 최태원 회장이나 최신원 회장이나 이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입에 올린 적은 없다. 방계에서 이런 얘기가 간혹 비치기도 하지만 양가의 중심에선 아직 우애와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