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선서를 마친 남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2016년 재심 청구를 준비하던 낙동강변 2인조가 변호인과 함께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그의 집 앞에 찾아온 일을 떠올린 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재판부가 “흥분하면 법원이 사실 관계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힘들더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증언 해달라”고 설득한 뒤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남자는 31년 전 낙동강변 2인조에게 강도를 당했다고 주장한, 당시 현직 경찰관이었던 한 아무개 씨다. 과거 경찰과 검찰, 법원에 각각 출석해 피해 사실을 진술했던 그는 6월 1일, 부산고등법원에서 열린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형사1부, 이흥구 부장판사) 첫 증인신문에서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청구인 최인철 씨.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실제 발생하지도 않은 사건 끼워 넣었다”
낙동강변 2인조 유죄 확정판결의 결정적 계기는 △공무원 자격사칭 사건 △낙동강변 부녀자 강간 살인사건 △현직 경찰관 한 씨 강도상해 사건, 이렇게 총 세 가지다. 과거 수사기록을 종합해보면, 당시 경찰은 경찰관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한 2인조를 검거해 여죄를 추궁했고, 이들이 한적한 장소에서 ‘카데이트’를 즐기던 남녀를 상대로 상습적인 강도 범행을 저질러 왔던 사실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발견된 게 살인사건과 강도상해 사건이다.
한 씨가 당했다는 강도사건은 범행 장소와 시간, 범죄 수법이 낙동강변 살인사건과 닮아있다. 판결문을 보면, 그는 1989년 12월 새벽 부산 사하구 신평동 인근 강변도로에 세워 놓은 차 안에서 여성과 데이트를 하다 두 명의 남성에게 강도를 당했다. 두 남자는 한 순경에게 7만 원을 빼앗고 트렁크에 감금했지만 한 씨가 탈출하자 도망쳤다. 사건 발생 2년 뒤, 2인조를 구속한 사하경찰서 경찰관들이 한 씨에게 이들을 데려갔고 그가 단번에 알아보면서 이 사건은 두 남자의 살인 혐의를 뒷받침할 핵심 사건이 됐다.
그러나 검경 수사기록과 법원 공판 기록을 모두 종합해보면, 한 씨 사건엔 석연치 않은 정황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 씨는 당시 사건 정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면서도 강도사건 발생 이후 2인조가 구속되기 전까지 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 살인사건 수사를 맡은 부산 사하경찰서 조사 과정에서도 강도를 당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와 같은 피해자인 여성은 그날 무도회장에서 처음 만나 데이트를 했던 사람이라며 이름도 모르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 씨는 사건 당시 타고 있었던 차량이 ‘대우 르망’이라고 진술했으나 재심 청구 과정에서 다른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국토교통부에 차량 번호를 조회해본 결과 차종은 르망이 아닌 ‘현대 스텔라’였다. 트렁크에 갇혔던 한 씨는 ‘힘껏 쳐서’ 탈출했다고 했는데, 이 방식으로는 탈출이 불가능 하다는 점도 확인됐다(관련기사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⑩] ‘현직 경찰 강도사건’ 재연해보니…‘거짓 진술 가능성’,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⑫] ‘현직 경찰관 강도사건’ 국가기관 통해 조작 사실 확인됐다). 박준영 변호사는 이를 근거로 2017년 재심을 청구하며 현직 경찰관 강도사건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낙동강변 2인조가 경찰의 고문과 폭행에 따라 허위자백을 했다는 결론을 내린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2019년 4월 박 변호사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피해를 주장하는 한 씨 진술을 제외하면 실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게 이 사건을 재조사한 대검찰청 과거사 진상조사단의 설명이다. 조사단은 과거 경찰이 2인조의 살인 혐의에 힘을 싣기 위해 발생하지도 않은 사건을 살인사건과 비슷하게 만들어 끼워 넣었다고 판단했다.
2인조는 한 씨와 대질한 이후 강도사건을 ‘자백’했다. 대검 진상조사단은 이 강도사건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사진=수사기록
#당당했던 경찰관, 변호인과 공방전
재심 법정에 선 한 씨는 자신이 ‘피해자’임을 분명히 했다. “모른다”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피해자이자, 목격자라서 범인을 잘 안다고 했다. 강도사건 발생 당시와 전후 상황을 분명히 기억한다며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변호인이 제공한 한 씨의 과거 진술조서 등을 확인하고 전후 관계를 다시 풀어놓거나 살을 붙였고, 당시 진술과 지금의 증언이 다르다는 변호인의 지적에는 “말꼬투리 잡지 말라”며 맞서기도 했다.
그는 과거 수사기록의 허점에 대해서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타고 있던 차량이 ‘르망’이 아닌 ‘스텔라’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내가 탄 차는 르망이 분명히 맞다”고 주장했다. 한 씨는 차를 술집 마담으로부터 그날 하루 빌렸다고 했는데, 술집과 위치, 마담의 이름을 뚜렷이 기억했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가 “차량 소유자를 모두 확인해본 결과 마담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자 “실소유주는 내가 알 바 없다. 나는 마담에게 빌린 게 맞다”고 반박했다.
변호인과 한 씨의 공방은 총 3시간 동안 이어졌다. 양측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변호인의 질문이 거듭되면서 한 씨로부터 모호한 답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씨는 변호인이 기록과 새롭게 확인된 사실관계들을 제시하자 대답 대신 언성을 높이다가 재판부에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특히 현직 경찰관이었음에도 피해를 당한 직후 물적 증거를 단 한 가지도 남기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묻는 변호인의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한 씨는 2인조가 범행 당시 자신의 옷을 칼로 찢어 손을 묶었다고 했으나 그 옷은 경황이 없어 버렸다고 말했다. 빌린 차의 조수석 유리창이 깨져 유리를 새로 끼워 넣고 세차까지 하고 돌려줬다고 했지만, 피해 사실을 입증한 자료에 포함되는데도 영수증 등을 경찰에 제출하지 않았고 진술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증거 수집은 수사기관에서 할 일이고 당시 수사 과정에서 별도로 증거를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아서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직후 사라져 버린 여성의 행방도 모른다고 했다. 과거 사건 기록에는 2인조가 강도 범행을 저지르고 도주한 직후부터 여성은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 한 씨는 도주하는 2인조를 잠시 쫓아갔다 현장에 돌아가 봤으나 여성은 그 자리를 떠났다고만 했다. 그는 같은 범행을 당한 피해자이자 목격자임에도 “피해가 있으면 여성이 직접 경찰에 신고할 것으로 생각했다. 직접 찾아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현직 경찰관 강도사건 현장검증 사진. 사진=수사기록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변호인과 증인의 공방을 지켜보던 재판부는 한 씨에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재판부가 지적한 지점은 한 씨의 ‘신고’다. 이번 재심 법정에서 “트렁크에서 탈출한 직후 곧바로 파출소로 갔고, 피해 사실을 구두로 설명하긴 했으나 당시 인적사항이나 진술서 등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 소속 경찰서는 물론 다른 곳에서도 신고를 하거나 피해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현직 경찰관이 강도를 당했다고 하면 수사본부가 차려지는 등 일이 커지고 무엇보다 ‘X팔렸다’(창피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 씨가 강도 피해를 당했다는 시점을 기준으로 한 달 뒤 낙동강변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비슷한 수법임에도 한 씨는 초동 수사를 했던 부산 북부경찰서에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다시 강도사건을 기준으로 2년 뒤 2인조가 구속되고 나서야 한 씨의 피해사실이 드러났는데, 한 씨가 먼저 사하경찰서에 알린 게 아니라 사하경찰서 쪽에서 한 씨를 찾아 2인조와 대질했다.
재판부는 “사건 발생 이후 파출소에 구두로 신고한 이후 창피해서 어디에도 말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사하경찰서는 어떻게 알고 재심청구인들을 데리고 증인을 찾아 갔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동안 목소리를 높여왔던 한 씨는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조용히 입을 뗀 그는 “수사기관이 어떻게 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북부경찰서와 사하경찰서 수사기록을 모두 확인한 결과, 한 씨 사건과 관련한 보고나 첩보는 없었다. 다만 사건에 관계된 경찰관계자 인사기록카드에서 과거 2인조를 검거하고 사건 수사를 주도적으로 했던 사하경찰서 경찰관과 한 씨가 앞서 중부경찰서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한 씨는 2인조 검거 전부터 앞서의 사하경찰서 경찰관을 알고 있었다고 했으나 자신의 강도사건을 말한 적은 없다고 했다.
한편, 이날 재심 법정에는 낙동강변 살인사건 피해자인 여성이 근무하던 공장의 사장 아내, 운전기사 등을 증인으로 불렀다. 이들은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사건과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아 구체적인 기억은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3차 공판은 6월 25일 오후 3시에 열린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