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이 연초 단행한 정기 인사에서 구조본 조직 강화에 무게를 둬 검찰수사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했다는 평을 듣고있다. 사진은 삼성그룹 본관. | ||
삼성그룹은 지난 몇 년 동안 그룹 구조본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에 대한 편법 재산상속 여부로 시달려왔고, 이를 사실상 삼성 구조본에서 지휘했다는 게 문제가 됐다. 게다가 지난해 불법 대선자금 제공문제 역시 삼성 구조본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었다.
때문에 구조본은 최대 위기를 맞은 듯했다. 이를 반영하듯 최고 책임자인 이학수 사장이 퇴진하고, 조직도 축소될 것이라는 성급한 관측도 대두됐다. 하지만 2004년도 삼성 정기임원인사에서 구조본 인사들은 대부분 승진하거나 핵심 요직에 배치됐다. 일반의 예상을 완전히 깬 조치였던 것이다.
이번 인사의 핵은 이학수 사장의 부회장 승진이다. 그는 지난해 초에도 승진 얘기가 나왔지만 사양하다 결국 이번에 승진해 삼성그룹 내에서 윤종용 부회장과 함께 삼성그룹 최고 의사 결정기관인 삼성그룹 구조조정위원회에 참석하는 두 명의 부회장 중 한 명으로 격상됐다.
삼성에는 이형도 중국본사 회장과 이대원 삼성중공업 부회장 등이 있지만 그룹 원로 경영인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구조조정위원회 멤버가 실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구조조정위원회 정멤버인 이학수 구조본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는 점은 구조본이 삼성그룹의 양대축인 삼성생명, 삼성전자와 더불어 핵심 조직임을 대내외에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생명의 경우 최고 경영자가 사장급인 점을 감안하면 삼성 구조본의 발언권이 그룹 최대의 캐쉬카우인 삼성전자와 동급, 삼성생명보다는 한수 위라는 풀이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이번 인사에서 삼성생명 등 삼성 금융 계열사의 승진폭은 예년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또 삼성 구조본에서 경영진단팀장을 맡았던 박근희 부사장이 경영위기를 맡고 있는 삼성캐피탈 사장으로 투입됐고, 구조본의 대외 업무 파트인 기획팀의 윤석호 전무는 삼성SDS 부사장으로 승진해 구조본을 떠났다.
또 구조본 기획팀 출신의 변종경 전무도 이번 인사에서 삼성SDI의 부사장으로 승진하는 등 구조본 출신들의 약진이 이어졌다.
삼성그룹에선 구조본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얘기가 이번 인사에도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또 이번 인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구조본의 체제가 과거 실장-차장 제도가 부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삼성은 지난 98년 DJ정부 시절 재벌 개혁에 발맞추어 그룹 비서실을 삼성 구조조정본부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체제로 슬림화시켰다.
▲ 그룹 경영 핵심축으로 떠오른 3인방. 왼쪽부터 김인주, 이학수, 윤종용 | ||
재계에서는 ‘이 실장의 파워’가 과거 90년대 초반의 ‘현명관 실장-이학수 차장’ 시절보다 한층 커졌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 김인주 차장도 부사장급인 최광해 재무팀장, 최주현 경영진단팀장, 이순동 홍보팀장, 노인식 인사팀장, 장충기 기획팀장을 총괄 지휘하게 된다. 다만 김용철 법무팀장(전무)과 김준 비서팀장(상무)만이 부사장급이 아닐 뿐이다.
삼성의 여타 계열사를 상대로 사실상 지휘 감독권을 행사하는 게 주업무인 팀장급이 부사장이라는 점은 삼성 구조본의 계열사 장악력이 한층 커질 것임을 예상케 하고 있다.
삼성의 이번 인사는 그룹 구조본 폐지나 선단경영을 반대하는 학계나 일부 시민단체의 주장에 대해 삼성의 대답인 셈이다. 삼성을 움직이는 힘은 구조본에서 나오고, 구조본은 그룹 회장인 이건희 회장의 명을 떠받든다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삼성식 신권(臣權) 경영’에 더욱 무게를 둔 것으로 풀이된다.
때문에 일각에서 나돌던 삼성증권 황영기 사장이나 삼성화재 이수창 사장, 삼성생명 배정충 사장 등 금융계열사 사장단의 구조조정본부 영입설은 일단 제동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구조본의 실-차장제도가 도입됨으로써 지난 10년간 콤비 플레이를 보여왔던 이학수-김인주의 재무팀 라인이 이건희 회장의 상속인으로 예정돼 있는 이재용 상무가 안착할 때까지 상당 기간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 상무의 경영수업 기간 중 개인교사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 진대제 사장은 관계(정통부 장관)로 나가버렸고, 금융 수업을 맡았던 황 사장 역시 이번 인사에도 구조본에 합류하지 않는 등 이학수 체제를 흔들 만한 인사기류가 이번에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학수 실장의 부회장 승진이 검찰의 불법대선자금 정국에서 벌어진 만큼 그의 승진이 불법 자금 조성 논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삼성의 또다른 자신감의 표출인지 주목되고 있다.
이와 관련,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지난 15일 삼성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구조본부장을 불법정치자금과 제공과정에서의 위법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외풍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의 경영축은 이건희-재용 부자를 필두로, 이학수-김인주-윤종용 등 3인방의 확고한 팀플레이가 계속 유효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