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측근인사는 “요즘 권 고문이 힘이 나는 것 같다”며 “자신과 당(동교동계)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를 돌파할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권 전 고문과 함께 동교동계의 또 다른 한 축인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지난 5월6일 개혁파가 주도하는 신당론에 대해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한 뒤 ‘민주당 고수’를 천명했다.
이어 광주·전남지역 의원들은 친노 개혁파와 배치되는 ‘통합신당’ 입장을 밝혔고, 9일 범동교동계 중도파 모임인 ‘개혁과 통합모임’이 신당 문제를 원점에서 재논의하자며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요구, 신당 추진 개혁파 의원들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됐다.
주목되는 것은 동교동계 인사들의 이러한 움직임들이 얼마 전 “민주당은 정통성을 잇는 당”이라고 성격을 규정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에 이어 나왔다는 점. 상황만 놓고 보자면 친노 개혁파와 동교동계 간의 신당 창당을 둘러싼 논쟁이 노무현 대통령과 DJ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는 셈이다.
“4월22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청와대 만찬이 고비였다.” 최근 신당 창당을 둘러싼 민주당 신·구주류의 첨예한 갈등에 대한 동교동계 핵심인사의 분석이다.
그는 “당시 회동에서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 간에 대북송금문제와 특검제, 민주당의 개혁 방향에 대해 적지 않은 시각차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그후 동교동계에서 민주당과 DJ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동교동계 인사는 “특검제 실시로 DJ가 치명타를 입을 경우 동교동계의 몰락은 불가피하다”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당 개혁과 신당논의가 궁극적으로 동교동계를 겨냥하고 있는 만큼 묵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DJ는 4월22일 노 대통령과의 회동이 있기 전까지 줄곧 동교동계의 반발을 무마하며 노무현 정부에 협조할 것을 주문해왔다. DJ가 1월3일 노 대통령과의 첫 회동 바로 전날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지시해 ‘동교동계 해체’를 발표토록 한 것이 대표적인 예.
또한 DJ는 새 정부 출범에 앞서 가진 노 대통령과의 두 번째 회동(2월23일)에서 ‘대통령에게 협조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측근들에게도 ‘노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을 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날 한화갑 대표는 전격적으로 대표직에서 사임, DJ의 뜻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한 전 대표를 비롯한 동교동계는 당내 신주류의 개혁방안과 ‘점령군’과 같은 태도에 내심 불만이 많았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자제해왔다.
그러나 3월14일 노 대통령이 자칫 ‘DJ가 다칠 수도 있는’ 대북송금 특검제를 수용하면서 동교동계의 태도는 일변했다. 개혁파에 정면으로 맞서며 동교동계 결집을 가속화한 것. 그 중심에 양갑(兩甲), 즉 권노갑 전 고문과 한화갑 전 대표가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지난 4월22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 현 정국에 대해 뚜렷한 시각차를 보였다고 한다. | ||
동교동계의 L의원은 “두 분이 이해관계로 멀어진 적은 있지만 등을 돌린 적은 없다”며 “최근 자주 연락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신당 창당과 인적 개혁문제에 있어 동교동계가 수세에 몰리면서 두 분(양갑)을 찾는 경우나 동교동계의 모임이 잦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동교동계 C의원은 “원내외 동교동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카리스마는 권 전 고문에게 있다. 한 전 대표는 동교동계의 결집된 힘을 당 안팎에 알리는 데 적격”이라고 평했다. 따라서 새 정부 출범 후 위기에 처한 동교동계가 결집하고 그 힘을 외부에 표현하는 데 양갑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 맥락에서 지난 4월22일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 결과는 동교동계에 충격과 함께 결집의 계기를 강화시켜준 셈이다. 동교동계 C의원은 “특검법이나 친노 개혁파의 ‘개혁신당’은 결국 동교동계를 떨어내자는 것으로 ‘노심’(盧心)이 반영된 게 아니냐”고 말했다.
권 전 고문의 한 측근인사는 “청와대 만찬 후 권 고문이 ‘호남당’이 돼도 좋으니 민주당을 지켜야 한다”며 “측근 인사들에게 내년 총선을 준비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동교동계의 행보는 5월 초 DJ가 동교동을 방문한 민주당 인사에게 “민주당은 해공 신익희 선생 이래 50년 동안 민주화를 위해 애쓴 민주세력의 정통성을 이은 전통 있는 당”이라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탄력이 붙었다.
강력한 포문은 ‘침묵’을 지키던 한화갑 전 대표가 열었다. 그는 5월6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친노 신당파의 당 밖 신당 추진을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강력히 비판한 뒤 다음날 귀국하는 인천공항에서는 “민주당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밝혔다.
한 전 대표는 9일 노 대통령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의원들과의 청와대 만찬에도 불참, ‘노심’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한 전 대표가 귀국한 지난 5월7일 광주·전남지역 민주당 의원들은 서울 한남클럽에서 모임을 갖고 민주당의 법통과 정통성을 계승하고 분당을 통한 신당창당을 반대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 친노 개혁파에 정면으로 맞섰다.
9일에는 민주당 중도파의원 모임인 ‘개혁과 통합모임’은 신당문제를 포함한 당의 진로문제를 원점에서 재논의하자는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요구해 개혁신당 추진파와의 정면 충돌을 예고했다.
동교동계 일각에서는 광주·전남지역 의원들의 모임이나 ‘비대위’ 구성을 위한 개혁·통합 모임에 권 전 고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권 전 고문은 5월23일 진승현게이트 관련 선고공판 결과 무죄로 판명될 경우 가장 먼저 ‘동교동’을 찾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한 전 대표는 귀국 직후 DJ를 찾아 미·일 방문 결과를 보고하고 향후 정치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는 후문이다.
정가에서는 최근 신당 논란과 연계된 동교동계의 활발한 움직임과 관련, 양갑이 ‘김심’(金心)을 매개로 과거 평민당 탄생과 같은 ‘동교동계 부활’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권 전 고문이 지인들과 자주 골프회동을 갖는 것이나 한 전 대표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는 시각이다.
민주당 개혁이 주도권과 인적청산 다툼으로 변질되면서 신주류와 동교동계의 ‘충돌’은 이제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대리전’ 양상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