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박근혜 전 대표가 ‘대구시당 6·2지방선거 해단식’이 열린 달성군 비슬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해 당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특히 정치권은 전국 8곳에서 치러져 ‘미니 총선’으로 불리는 7월 재·보선에서 박 전 대표가 어떠한 역할을 할지에 주목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컴백’한다면 자신의 ‘전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거를 통해서일 것이란 관측 때문이다. 몇몇 친박 의원들은 박 전 대표가 재·보선까지 외면할 경우 보수 지지층이 이탈할 것이란 우려를 하기도 한다. 벌써부터 한나라당 내에선 박 전 대표가 재·보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을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온다. 지방선거 이후 본격적인 대권가도를 걷기 위해 신발 끈을 조여매고 있는 박 전 대표의 7월 재·보선 참여설, 그 배경을 따라가 봤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면했다.” 방송사 출구조사가 발표된 직후 한 친박계 의원이 던진 말이다. 그는 “박 전 대표 없이 치른 선거에서 친이가 압승할 경우 우리 힘은 급속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국민들이 친이의 독주를 심판한 것 아니겠느냐”면서 “앞으로 여권 주류가 친박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시간 수도권의 한 친이계 의원은 “설마 했는데 이렇게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인천시장을 제외한 경기와 서울은 6월 2일 전날까지도 여유롭게 이기고 있었는데 의외다. 박 전 대표가 조금만 힘을 보탰더라면 강원 경남 등 몇 석은 더 건질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친박 의원에게선 향후 정국에 대한 ‘기대’가, 친이 의원에게선 박 전 대표에 대한 ‘원망’이 느껴졌다. 뉘앙스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박 전 대표의 ‘부재’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친이와 친박 의원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정치권 일각에선 박 전 대표가 이번 지방선거 패배로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에 속해 있는 달성군에서 적극적인 지원 유세를 펼쳤던 친박 후보가 무소속 친이 후보에 패하면서 정치적 입지에 타격을 받았다. 친이 진영 일부에서 박 전 대표가 도와줬어도 지방선거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한나라당 대주주이기도 한 박 전 대표를 향해 지방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론’을 꺼내드는 이들도 있다. ‘윤 정치연구소’의 윤호석 소장은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해왔던 박 전 대표가 얻은 게 무엇 있나. 전리품은 결국 민주당이 챙겼다. 박 전 대표가 당을 나갈 것이 아니었다면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도왔어야 한다. 비주류인 박 전 대표가 세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스스로가 그것을 차단했다”면서 “지도부가 모두 사퇴한 마당에 당분간은 전면에 나서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이번 지방 선거로 인해 박 전 대표 몸값이 오를 것이라는 견해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한 친박 보좌관은 “박 전 대표는 당 지도부 위주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일찌감치 거리를 뒀는데 무슨 책임론이냐. 그동안 이 대통령이 국정 파트너로서 정당한 대우를 해줬더라면 박 전 대표가 외면했겠느냐. 이제 와서 그러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달성 역시 선거 초반 20%포인트 이상의 차이였던 격차를 박빙으로 만들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역전됐을 것이었다. 박풍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경상도 지역 한 친이 의원 보좌관 역시 “한나라 텃밭인 경남지사 선거에서 박 전 대표가 지원 유세만 한 번 해줬더라면 결과가 바뀌었을 것이란 말이 많다. 골수 친이 후보(이달곤 후보)를 내세웠던 것 자체가 패착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박풍 이외엔 우리가 다음 선거에서 기댈 만한 것이 없지 않느냐. 대안이 없다.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박 전 대표에 대한 쏠림 현상은 심해질 것”이라고 털어놨다.
지방선거 패배 후 대대적인 쇄신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여권 핵심부에서도 박 전 대표 끌어안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야권의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여권 차기 주자 ‘영순위’로 꼽히는 박 전 대표와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울 경우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더욱 어려울 것이란 판단에서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이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보다 임기 내에 더욱 많은 실적을 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로 인해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여러 정책들이 차질을 빚을 수도 있어 우려하고 있다. 친박만 협조한다면 한나라당은 ‘다수당’ 아니냐. 박 전 대표 도움이 절실하다”고 귀띔했다.
청와대 측은 박 전 대표가 오는 7월 치러지는 재·보선에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전언이다. 재·보선마저 야권에 내줄 경우 이 대통령은 조기 레임덕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면 야권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묻어난다. 이 때문에 여권 일각에선 박 전 대표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 세종시 수정안을 접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친박 진영에선 이러한 여권 주류의 움직임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친박의 한 중진 의원은 “그동안 공천학살, 친박 사정설 등 얼마나 우리 뒤통수를 많이 쳤느냐. 그러나 이번엔 친이계도 박 전 대표 없이는 선거가 힘들다는 것을 새삼 느꼈을 것이다. 박 전 대표도 이제 대권을 준비해야 할 시기인 만큼 이럴 때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고 전했다. 특히 친박 의원들 사이에선 이번 기회에 세종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실리주의’도 엿볼 수 있다. 세종시 원안을 지켜내면 충청표를 얻을 수 있어 2012년 대선과 총선에서 유리할 것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의 친박 중진 의원 역시 “청와대가 먼저 박 전 대표를 위한 판을 만들어 줘야 한다. 세종시가 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로서도 이제 더 이상 ‘침묵’을 고수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지지율이 눈에 띄게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지방선거 전날인 6월 1일 발표한 박 전 대표 지지율은 25.1%. 이는 올해 1월 40.4%에 비해 15%포인트가량 떨어진 수치다. 친박 내에서도 박 전 대표 지지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표 자문그룹에 속해 있는 한 대학교수는 “박 전 대표 지지율은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이 대통령과 공방을 벌였을 때 최고치를 기록했고, 그 이후 줄곧 하락추세였다. 4대강 사업, 지방선거 등 주요 이슈에 대해 침묵했던 것이 마이너스 요인이 된 것 같다. 로열티가 유난히 강했던 전통적인 지지층도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대권 주자로서 심판받을 건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고, 박 전 대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박 전 대표는 후반기 국회에서 개헌과 4대강 사업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후반기 국회 상임위에 기획재정위원회를 신청한 것 역시 4대강 사업 예산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박 전 대표는 오래 전부터 7월 재·보선의 중요성을 측근들에게 강조해 왔다. 지난 5월 중순 몇몇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지방선거보다 재·보선을 더욱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전 대표가 7월 선거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윤호석 소장은 “박 전 대표는 탄핵정국으로 2004년 총선에서 패한 당을 이끌고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다. 박 전 대표가 유력 정치인으로 이름을 올린 것도 그 무렵부터다. 이번 재보선이 지지율 침체에 빠져 있는 박 전 대표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중도성향 의원 역시 “박 전 대표는 당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다. 지금의 위기를 모른 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번 달성군수 선거에서 패한 것이 보약이 됐다. ‘박근혜’라는 이름 석 자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면서 “재·보선을 통해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전 대표의 재·보선 지원이 가시화될 경우 이는 차기를 향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친이 주류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친박이 당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친박의 일부 의원들은 박 전 대표가 나서는 조건으로 6월 말 또는 7월 개최될 예정인 전당대회에서 자파 소속의 당 대표 추대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재·보선 공천권 역시 마찬가지다. 박 전 대표 측근으로 꼽히는 한 의원은 “솔직히 우리들은 대선보다 2012년 총선이 더 큰 문제다. 이번에 재·보선에서 박 전 대표가 진면목을 발휘하면 상당수 친이 의원들이 박 전 대표에게 ‘투항’할 것으로 본다. 박 전 대표로서는 이번 재·보선이 외연을 넓힐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