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드라마 <검사프린세스>의 한 장면.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그 어느 장소보다 편한 마음으로 임하는 화장실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때가 간혹 있다. 난감한 상황에 대책마련도 쉽지 않다. 식음료회사에 근무하는 H 씨(여·30)도 화장실에서 진땀나는 일을 겪었다. 아직도 쉬쉬하는 그녀만의 비밀이다.
“여자 화장실이 두 칸인데 하나는 좀 잘 막히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평소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나요? 급하면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거죠. 하필이면 제가 걸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큰일을 보고 물을 내렸는데 그만 막혀버렸어요. 넘칠 것처럼 올라오다가 아슬아슬하게 내려가는데 몇 번을 내려도 안 되는 거예요. 시간은 흐르는데 해결은 안 되고, 옆에 세워져 있던 ‘뚫어뻥’을 사용했는데도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옆 칸에서는 다른 직원이 옷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는데 들킬까봐 조마조마 하더라고요. 아, 정말 식은땀이 흘렀어요. 결국 아무도 없을 때 그냥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에서 조금 있다 한 여직원이 ‘범인이 누구냐’고 소리를 지르더군요. 사실 고백할까 했는데 술렁대는 분위기에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그 뒤로 한동안 H 씨가 사용했던 화장실은 ‘사용금지’ 쪽지가 문에 붙어 있었단다. 그는 “그 일 이후로는 절대 그 칸을 사용하지 않는다”며 “옷 갈아입던 직원이 나인 줄 아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좀 창피하다”고 고백했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K 씨(29)의 신입 시절 이야기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부서에 비상이 걸렸었어요. 저는 사수 격인 대리를 도왔죠. 드디어 디데이, 전날 늦게까지 야근을 해서 정신도 없는 와중에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에 갔습니다. 일을 보고 일어나는 순간 ‘퐁당’하는 경쾌하고 찜찜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제가 ‘프리젠터’를 뒷주머니에 넣고 있었거든요. 왜 보통 레이저 포인터라고 하죠. 피티 시험가동을 하다 와서 급한 김에 뒷주머니에 꽂고 있었는데 그게 빠진 겁니다. 무선마우스 기능까지 있는 고급제품으로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거였는데 눈앞이 캄캄했어요. 물로 씻으면 작동이 안 될까봐 일단 재빨리 건져서 휴지로 닦아 건조기로 말렸죠. 다행히 작동은 되더군요. 대리한테 프리젠터를 건네는 손이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여성 직장인들이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공간도 바로 화장실이다. 기업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28)는 화장실에서 겪었던 창피한 사건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희 부서는 야근이 잦아요. 그때 그 사건도 야근하다 빚어진 거였죠. 회사 건물이 10시가 넘으면 굉장히 조용해요. 거의 소등을 해서 좀 으슥한 곳도 많고 무섭죠. 그래도 볼일은 봐야겠기에 혼자 화장실로 갔어요.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한 남자가 바로 옆의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더군요. 괜히 불안한 마음에 얼른 일을 보고 나오는데 남자도 동시에 나오는 거예요. 발걸음이 좀 빨라졌는데 그 남자도 속도를 높여 분명 절 따라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죠. 그러다가 누군가 갑자기 제 어깨를 쳐 ‘악’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남자분이 더 놀라면서 조용히 하는 말이 ‘스타킹 속에 치마 들어갔어요’ 하는 거예요. 순간 뒤를 만져보니 원피스는 간데없고 스타킹이 만져지더군요.”
화장실과 스타킹에 관한 일화는 생각 외로 빈번하다. 화학 관련 기업에 근무하는 L 씨(여·31)도 화장실, 하면 스타킹이 먼저 떠오른단다.
“겨울이었는데 검은 스타킹에 무릎까지 오는 높은 부츠, 짧은 치마를 입고 출근했어요. 그러다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에 갔는데 일을 보고 스타킹을 올리다 손톱에 걸려 올이 쭉 나가버렸어요. 안 그래도 몇 군데 실금이 가 있어서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스타킹을 못 신게 돼 버렸죠. 마음 놓고 일 좀 보려고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 왔는데 초미니스커트에 맨 다리를 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왔으니 그 추운 겨울에 다른 직원들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죠. 그 뒤로는 사무실 책상에 항상 여분의 스타킹을 마련해 둬요.”
화장실은 때로 일로 지친 직장인들에게 은신처 혹은 휴식처가 된다. 근무시간 중 아무도 없는 화장실은 기분까지 좋다. 하지만 오래 있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오래 있다가 혼쭐이 난 S 씨(29)는 화장실만 가면 정신을 바짝 차린단다.
“신입 시절이었어요. 영업팀이라 술자리도 많고 남자 직원들이 많아 부서 분위기도 좀 군대 같고 회식도 잦은 편이었죠. 술을 잘 못 마시는 터라 매일 피곤함에 절어 버티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전날 술을 마시고 출근했는데 너무 졸린 거예요. 세수라도 하려고 화장실에 갔죠. 일단 비데변기에 앉았는데 아, 정말 따뜻하더라고요. 엉덩이가 뜨끈뜨끈 하니까 솔솔 잠이 오더라고요. 잠깐만 앉아 있다 가야지 했는데 노크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출근하고 얼마 뒤에 왔는데 말이죠. 사무실로 돌아가서 선배한테 엄청 깨졌습니다.”
중소기업 회계팀에서 일하는 Y 씨(여·26)도 화장실을 나만의 놀이터 삼다가 선배한테 딱 걸렸던 경험이 있다.
“특히 셀프 카메라 찍는 걸 좋아하는데요,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을 때 화장실에 살짝 와서 셀카를 찍으면 기분이 좀 풀리거든요. 화장실 조명이 좀 화사하잖아요. 한번은 일하다 답답해서 화장실에서 열심히 셀카를 찍고 있는데 한참 찍다가 ‘너 뭐하니?’ 하는 소리에 놀라 뒤를 보니 같은 팀 선배였어요. 매번 없어져서 한동안 있다 오니 궁금해서 따라온 거죠. 볼도 부풀리고, 윙크도 하고 별 요상한 포즈를 다 잡고 있었는데 딱 걸려서 이제 화장실 셀카 놀이는 끝났어요.”
욕실제품 전문 업체에 근무하는 R 씨(여·30)는 “직장인들에게 화장실은 단순히 볼일만 보는 공간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모이는 장소”라며 “특히 여성 직장인들에게 있어 화장실의 수준은 빼놓을 수 없는 체크사항”이라고 말했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