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에 빠져들어 전 재산을 탕진하기까지 이들의 사연은 그야말로 구구절절했다. 알선조직의 유혹에 넘어가 도박의 늪에 빠져버린 필리핀 원정도박단의 막장 인생 스토리를 들여다봤다.
재력가 A 씨는 도박을 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재미 삼아 시작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빠져버린 ‘골프’ 때문이었다. 마닐라로부터 북부 고속도로를 타고 약 1시간 30분이면 닿는 미모사 리조트가 그의 최종 목적지였다. 미모사는 필리핀에서 유일하게 종합 리조트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춘 명문 멤버십 골프장으로, 1998년 당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방문해 라운딩을 한 이유로 명성을 떨쳐온 곳이다. A 씨는 타이거 우즈가 거닐던 필드 위에서 골프를 쳐보고 싶었다. 미모사에서 라운딩을 한 A 씨는 한국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근처 술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곳엔 골프를 치러 온 부유층 인사들을 ‘바카라’의 늪으로 유혹하기 위해 온 알선 조직 일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호텔비, 식사비 등 VIP급 대우를 제공하며 A 씨에게 접근했고 그가 관광을 원할 땐 필리핀 현지 경찰차를 불러 그를 호위해주기까지 했다. 도박 자금이 떨어지면 필리핀 현지 카지노 2층에 차려놓은 사무실에서 자신들의 국내 계좌를 통해 돈을 송금, 환전토록 하거나 직접 현금까지 빌려줬다. 도박에 처음 발을 들인 A 씨는 몇 십 만 원부터 베팅을 시작했다. 한 번 더 하면 잃은 돈까지 전부 딸 수 있다는 알선업자의 꼬임에 넘어간 그는 결국 억대의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알선조직의 수법은 이처럼 치밀했다. 알선 총책 김 아무개 씨는 현지에 직접 국내 여행사를 두고 관광 온 사람들을 직접 카지노로 안내했다. 필리핀 내 한인 마을에서 렌트카, 식당, 숙박업을 하는 사업자들에게 중개수수료를 건네며 한인들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A 씨처럼 필리핀에 골프를 치러 온 부유층 인사들에게 직접 접근해 도박을 알선하기도 했다.
기업체 사장 B 씨 역시 필리핀에 골프를 치러 갔다가 현지 브로커의 꼬임에 넘어가 2억 원을 잃었다고 한다. 건실했던 중소기업 사장 C 씨에겐 도박에 얽힌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경기도 화성에서 종업원 20명을 둔 화학약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던 그는 2000년 10월 말 강원랜드 카지노를 찾았다가 ‘바카라’ 도박에 빠져들었다. 하루 만에 3000만 원을 잃은 C 씨는 다음 날 5000만 원을 손에 들고 다시 카지노를 찾았지만 이마저 5~6시간 만에 날려버렸다. 심장병을 앓던 아내마저 잃고 매달 강원랜드를 찾은 지 꼬박 3년 만에 그의 회사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전 재산 70억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그는 중국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필리핀으로 여행을 갔다가 유혹을 떨치지 못해 또다시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해외로 도박 원정을 갔다가 돈을 따고 돌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범행을 부인하고 있는 학원장 D 씨의 경우 도박으로 총 3억 원을 잃었고, 경기 안산의 30대 주부 E 씨는 단 한 번의 원정 도박으로 1800만 원을 잃었다. 수에 밝은 공인회계사 F 씨 역시 2000만~3000만 원가량 잃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검거된 31명 중 ‘바카라’로 돈을 따고 돌아온 부동산 업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카지노를 처음 경험한 초짜였지만 1600만 원을 따고 돌아왔다고 한다.
김태우 도박연구센터 임상심리 전문가
“도박은 알코올·마약 같은 병이다”
도박 중독은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것일까.
기자는 지난 3월 31일 습관성 도박 연구 센터에서 임상 심리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태우 씨와 위 내용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김 씨는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의 환경적 요인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요즘 도박 중독이 ‘뇌’의 문제라는 학계의 주장이 관심을 끌고 있다. 도박 중독 기전(機轉)과 마약, 알코올 중독 기전은 동일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특정 행동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기전에서 도파민이 분비된다. 그런데 알코올, 마약, 도박 중독의 기전이 모두 동일하다고 한다”면서 “할아버지, 아버지가 알코올, 도박 중독이 심할 경우 그 다음 대에 동일한 중독 문제가 불거지는 등 유전적 요인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로 꼬집어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도박 중독자들의 공통점은 ‘대박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학습 심리학 상의 ‘간헐적 강화’와 연결된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보상이 더 큰 보상처럼 느껴진다는 이론이다. 우연한 기회에 도박을 하다 얻은 행운의 기억은 뇌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