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군 사령부 지휘부(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정희 장군). |
박정희 준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53년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1954년 봄이었다. 당시 필자는 육군 대위로 강화도 화천 소재 한국군 2군단장의 전속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 준장이 2군단 포병사령관으로 부임해왔다.
참고로 백선엽 대장 저서 <군과 나>를 보면 1948년 여순반란 사건 후 있었던 군내부의 좌익 숙청 시 박정희 소령이 관련되었으나 그의 협조로 군내부의 좌익 조직은 완전 소탕되었다. 박 소령은 그 당시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 대령이 꼭 살리려고 예편선에서 마무리지었고, 이후 정보국 문관으로 있다가 6·25동란 발발 후에 현역 복귀를 시켰더니 대통령까지 되었다고 적혀 있다.
박 장군의 첫 인상은 작업복을 다려 입은 작은 체구였지만 꼿꼿하고 과묵하면서 무게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말을 앞세우지 않고 실천을 중시하는 타입으로 느껴졌다. 특히 박 장군은 인품이 뛰어났다. 한국전쟁을 겪은 전쟁 영웅들이 즐비했고, 박정희 준장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그한테는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있었다. 장성들은 권위를 앞세웠지만 박 준장은 유독 그렇지 않았다. 우리 초급장교들에게도 다정하게 대해준 것을 기억한다.
이때 군단장은 5·16 때 육군참모총장으로 잠시 최고회의의장 겸 내각수반을 한 장도영 소장이고, 참모장은 후에 감사원장이 된 이주일 준장이었다. 이때 2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대장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으로 가고 백선엽 대장이 새로 생긴 1군사령관이었다.
그 후 나는 다시 미국유학을 떠났고, 귀국해서 원주에 있던 제1군사령부 비서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와 보니 박정희 준장이 1군 산하의 7사단장으로 있었다. 필자와는 초반부터 제법 질긴 인연이었던 것 같다. 당연히 1군지휘관 회의 등에서 수시로 접촉했고, 그는 곧 소장으로 진급해 임부택 소장의 후임으로 1군 참모장에 부임했다. 필자의 직속상관이 된 것이다. 이때 참모장 보좌관으로 윤필용 중령이 7사단에서 따라 왔는데 그는 내가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의 교관을 할 때 학생이었다. 당시 한국 학생으로는 윤필용을 비롯, 박경원, 차규현, 윤성민, 민경중이 있었다. 이때 1군사령부는 최석 부사령관, 조재미 참모부장, 채명신 이용작전처장, 김용순 군수처장, 김현옥 수송부장, 송찬호 포병사령관, 박경원 인사처장, 김경옥·이재순 비서실장이 포진해 있었다.
그 시절 잊지 못할 기억이 몇 개 있다.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한 장군들에게 국방부(장관 김정열)에서 계급장을 달아줄 터이니 상경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박정희 소장은 “그런 일로 작전지역을 떠나면서까지 올라오라 마라 한다”며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들 높은 곳과 줄을 못 대서 안달인데, 높은 곳에서 진급 계급장을 준다고 올라오라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것이다. 개인적으로 많이 놀랐다.
박정희 소장의 참모장 시절에는 그 당시 한미공조가 절대적인 때라 미군과의 작전협의 등에서 영어에 능통하고, 미군 사정을 잘 아는 필자가 많이 필요했다. 가끔 브리핑 때 전 지휘관 앞에서 내가 송요찬 사령관으로부터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 박정희 소장은 나중에 조용히 불러서 “그냥 (참고) 있으라”고 위로했고, 또 다른 애로사항을 전부 해결해주곤 했다.
▲ 1959년 10월 박정희 소장의 함대 방문. |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자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인 박 장군은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그런데 한번은 박 장군이 시위대와 같이 만세를 삼창한다는 이상한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4월 26일 이승만 박사 하야 후의 혼란기, 즉 송요찬 장군의 주가가 치솟았을 때 박정희 장군은 아주 민감한 내용의 편지를 송 장군에게 보냈다. 참고로 당시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던가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박정희 전문가’로 유명한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이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렇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온 다음날(4월 27일) 김정열은 육본으로 가서 송요찬 참모총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총장 부관 김운용 소령이 들어오더니 “미군 군사고문단장 하우즈 장군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송 장군이 읽어보라고 했다. 김 소령이 즉석에서 번역하여 읽어 내려가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중략) ‘대단한 변동을 겪고 있는 한국에서 미국 정부는 앞으로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송요찬을 쳐다보고 물었다.
“송 장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이고, 만고역적이 되게요.”
김정열은 회고록에서 ‘긴장된 송 장군의 얼굴에서는 내심 좋아하는 듯한 표정이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고 썼다.
미국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송요찬 장군에게 맡긴다고 서신을 보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장군은 그런 송요찬을 상대로 “지금 4·19 수습으로 영웅 기분 내고 있겠지만 인기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3·15 부정선거 때 군의 책임자였으니 빨리 사임하십시오”라고 직언을 날린 것이다. 내용이 너무 직선적이어서 이 서신은 당시 김정열 국방장관에게만 보여주고 덮었다. 나중에 그 서신에 대해 보고받은 송 참모총장은 믿었던 박 장군이 그런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노발대발했고, 부산에 최홍희 소장을 내려 보냈다.
장면 정부가 들어선 후 개혁성 있는 최경록 중장이 참모총장이 되자 개혁 성향이 있는 박정희 소장이 다시 중용됐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G-3)으로 기용된 것이다. 그런데 곧 육사 8기생들의 ‘16명 하극상 사건’이 일어났고 김종필, 석정선 등이 전부 예편했다. 이와 관련해 미 8군 사령관 카터 B. 매그루더(Magruder) 대장의 강요에 의해 박 장군은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다시 좌천되었다.
곧이어 최경록 참모총장도 미국군수국장 팔머(Palmer) 대장에게 내정간섭 하지말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돼 대구 2군 사령관으로 좌천됐고, 이어 장도영 2군사령관이 참모총장이 된 후 5·16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개인적으로 ‘16명 하극상 사건’과 ‘박 장군 좌천’ 등이 그 시국에 혁명의 결심을 굳힌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 1959년 쌍십절 대만 방문 모습(가운데가 박정희 장군). |
5·16 당시의 기억도 선명하다. 5월 16일 아침에 자고 있는데 총소리가 계속난다. 총기 오발 사고는 아닌 것 같아 특무부대장 이철희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장군은 “쿠데타입니다. 이미 보고했습니다”라고 했다. 하우즈(후에 미8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장의 보좌관이었던 나는 미8군으로 출근하며 급변하는 사항을 보게 됐다. 곧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장도영 참모총장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었지만 힘은 없었고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박종규, 장동운, 김동하, 홍종철, 오정근, 길재호, 채명신 등의 이름이 나왔다. 박종규가 장면 총리를 체포하러 갔지만 이미 피신한 후였고, 3일 후에 나타나 내각이 총사퇴했다. 사퇴하려던 윤보선 대통령은 번의해서 유임했고, 혁명에 비협조적인 이한림, 강영훈, 최석, 김응수는 구금, 최경록은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8군의 한국군 귀대명령은 무시되고, 국회도 해산되고, 곧 최고회의와 중앙정보부가 탄생하고 반공을 국시로 하면서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군사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5·16 후 미8군 사령부(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와의 작전권 문제도 양해(해결)됐다. 미국 측은 5·16 주체세력이 혹시 좌경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반공을 국시로 하는 것을 알고 한미관계도 정상화되어 갔다. 동시에 군사정부의 입지도 강화되면서 정치가 안정화되자 곧 경제안정과 개발에 착수했다.
‘18년간 독재’라는 수식어 때문에 박정희이라는 이름 석 자는 항상 개혁의 대상이나 보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본 ‘군인 박정희’는 지극히 깨끗하고, 또 윗사람보다는 아랫사람을 중시하는 높은 인격을 갖췄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역사적인 정의감을 바탕으로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누구보다 강하게 개혁을 요구했던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야당도 이런 야당이 없는 개혁 세력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미국이 처음에 좌경으로 의심했겠는가. 요즘 같은 ‘보수 vs 진보’라는 엉터리 이분법에 의하면 군인 박정희는 진보 중에서도 가장 왼쪽에 있던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돌고 돈다. 단순 무식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강화를 위해서 마음껏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를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군인’ 박정희를 회고하면서 끝으로 유명한 유머가 하나 생각난다. 군인 박정희의 결혼식 때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의 결혼식…”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객들 사이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유머를 신문이나 책 등 활자로 접했겠지만, 필자는 반세기(50년) 전 원주 시내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직접 듣고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인간적인 구수함을 잊기가 힘들다.
전 IOC 수석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