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하는 김대 중 전 대통령의 뒷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요즘 가까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셨던 동교동계 인사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오가는 얘기다. 지난 3월초 동교동 사저로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갔던 한 인사는 “건강이 너무 안좋아 말도 못하고 인사만 하고 왔다”고 말했다.
지난 5월7일 미국에서 귀국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동교동을 찾을 계획이었으나 DJ의 ‘사정’에 의해 전화통화만 했다. 다음날 DJ는 서울 순천향병원에 입원했고, 이틀 뒤인 10일에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1주일 만에 퇴원했다.
‘DJ 건강이상설’은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끊임없이 나돌았지만 청와대측의 부인과 담당 주치의의 해명 등으로 수면 아래로 잠복돼 왔다. 그러나 DJ가 퇴임 후 세 차례나 병원 신세를 지고 병명이 ‘소문’으로 치부되던 것과 같은 증세로 밝혀지면서 DJ의 건강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DJ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 전 가장 최근에 얼굴을 보인 것은 지난 4월22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만찬 때다.
이날 DJ의 모습에 호남 출신들은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한 호남 출신 인사는 “너무 당당한 노 대통령에 비해 힘없어 보이는 선생님(DJ)을 보니 ‘호남소외론’이 피부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만찬 때) 선생님 예전의 얼굴이 아니었다”며 “무슨 병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호남인들의 직감이 적중한 듯 DJ는 어버이날인 5월8일 서울 순천향병원에 입원해 위 기능 조사를 받았고, 10일에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1주일간이나 치료를 받았다.
DJ는 지난 2월25일 퇴임 후 4월13일 종합검진을 위해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입원한 것을 포함해 세 차례나 병원 신세를 졌다. 재임중이던 지난해 4월10일 과로로 엿새 동안, 8월13일 폐렴 증세로 이틀간 입원한 것까지 포함하면 1년 새 다섯 번이나 입원한 셈이다.
이와 관련, DJ정부 시절 청와대 관계자는 DJ 건강이상설을 일관되게 부인했고, 주치의 또한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밝혔다. 최근 DJ를 직접 치료한 세브란스병원 의료진도 16일 “연세에 비해 회복속도가 매우 빠르다”며 “추가 치료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DJ를 수행한 인사나 DJ의 치료에 관여했던 일부 의료계 인사는 DJ의 건강에 이상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DJ는 97년 대선 때부터 줄곧 ‘건강 이상설’과 싸워왔고 대선 때는 고혈압, 당뇨병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재임 중에는 암 발병설이 나돌기도 했다.
DJ의 건강 이상설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서도 전해졌다. 2001년 3월, DJ가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뒤 미국 정가와 국내 미8군 사령부 주변에서는 DJ 건강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DJ에게 암(대장암, 위암) 증세가 있고, 신장(콩팥)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 미국 정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DJ가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 미국 CIA는 DJ의 대소변을 분석하고 그러한 결과를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한국쪽 정보원을 통해 DJ의 건강을 체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 지난 4월22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청와 대 만찬 회동 모습. | ||
국내에서는 대선이 있던 2002년 4월, DJ가 국군병원에 입원하면서 ‘건강이상설’이 급부상했다. DJ가 입원한 배경을 놓고 청와대와 주치의가 상반된 주장을 한 것도 건강이상설을 증폭시켰다.
당시 청와대는 “대통령의 왼쪽 허벅지 근육에 염증(좌측대퇴부염좌)이 생겨 치료를 위해 소염진통제를 복용한 것이 위장 장애를 일으켜 영양수급에 문제가 일어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의들은 청와대측의 발표에 의문을 표시했다. 소염진통제가 60대 이상의 노인에게 위장장애를 일으킬 수 있지만 소화장애가 전혀 없는 소염진통제도 있는데 청와대가 그런 약을 쓰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심각한 병을 숨기고 있다고 본 것이다.
월드컵 후 대선레이스가 본격화한 7∼9월 사이에는 ‘DJ중병설’ ‘췌장암설’ 등 갖가지 의혹이 난무했다. 정가에서 이한동 전 총리가 비상 대권주자로 부상하고, 총리교체설이 자주 등장한 것도 그 즈음이다.
이와 함께 영국 최고 의료진이 극비리에 청와대를 다녀갔고 중국 명의가 DJ를 대면했다는 내용 등의 루머와 북한과의 관계로 청와대와 가까운 미국의 E재단이 ‘특효약’을 DJ에게 제공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DJ정부 시절 청와대 관계자와 의료진은 소문들을 ‘낭설’이라고 일축한다. 문제는 그러한 소문들의 일부가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DJ는 지난 5월10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관상동맥 확장수술을 받고 바로 퇴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장 기능에 이상이 생겨 12일과 14일 두차례 혈액투석을 했다.
DJ의 신장이상설은 2001년부터 거론돼 왔고 지난해 4월 DJ가 국군병원에 입원했을 때 집중적으로 흘러나왔다. 당시 병원 관계자는 “위장 기능보다 신장이 심각한 상태”라고 말했다. DJ가 신부전증이어서 혈액투석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DJ는 71년 대선 당시 교통사고를 당한 후 후유증으로 고관절염(외상으로 인한 관절염)을 앓아왔다. 30년 넘게 소염진통제를 사용하다보니 다른 기관에 이상이 왔다.
가천의대 길병원 이수찬 원장은 “소염진통제는 고관절염에 효과가 있지만 위장관, 간, 신장 등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의료계에서는 청와대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DJ에게 당뇨와 고혈압이 있다고 의심했다. DJ의 주치의가 당뇨병에 관한 국내 권위자인 허각범 전 연세대의대 교수와 장석일 박사인 데다 DJ에게 나타난 증세 때문이다.
당뇨병 합병증 가운데 가장 빈발하는 것이 신부전증이다. 혈액투석은 그에 대한 대표적인 치료방법 중 하나다. DJ는 최근 세브란스병원에서 그러한 치료를 받았다.
5월10일 DJ가 병원에 입원한 뒤 동교동계 주변에서는 DJ의 건강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신장과 순환기 계통이 안 좋은 데다 폐암 증세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이희호 여사 등 가족들은 퇴임과 함께 미국이나 영국으로 건너가 암 전문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방안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송두환 특검팀 관계자에게 DJ의 건강 상태가 몹시 좋지 않기 때문에 소환조사에는 응할 수 없으므로 서면조사 등으로 대신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대통령의 유고(有故)는 국가변란에 해당되기에 재임중 ‘대통령의 병’은 1급 기밀사항에 속한다. 때문에 DJ의 건강(병)은 철저하게 보안에 붙여졌고 소문의 벽에 갖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재 DJ는 퇴임했지만 신당을 둘러싼 정치권의 혼란과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DJ 건강의 ‘진실’은 정치권의 흐름에 주요 변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DJ의 구체적인 건강 상태는 아직 안개속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