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 원내대표는 막강한 정보력을 틀어쥔 민주당의 대표적인 ‘저격수’로 꼽히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천성관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박지원 의원이 천 후보에게 질의하는 모습. 결국 천 후보자의 임명은 무산됐다. |
“박지원에 의한, 박지원을 위한, 박지원의 청문회였다.”
김황식 총리 인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던 지난 10월 1일 청와대의 한 정무라인 관계자가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야당 원내대표 눈치를 보는 게 현실이다. 김황식 총리는 박지원 대표가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도 김태호 후보자 낙마 이후 ‘청문회 통과’를 총리 인선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던 이명박 정부가 김황식 총리를 낙점하기 전 박 대표와 미리 합의를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김태호 후보자보다 더욱 심하다’는 말까지 나왔던 김 총리 후보자 인사 청문회가 싱겁게 끝나자 여권 내에선 ‘박 대표 위력’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사실 박 대표가 이명박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최근의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뿐만이 아니다. 박 대표는 정권 출범 이후 치러졌던 여러 차례의 국정감사와 인사청문회에서 매번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지난해 7월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의 임명을 무산시켰던 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로 촉발된 ‘영포회 파문’이 불거졌을 때는 대여공세를 이끌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여권 핵심부에서는 지난해 말 박 대표에게로 정보가 새어나가는 ‘루트’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을 극비리에 실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최근엔 박 대표와 가까운 한 변호사 사무실이 정보 산실 중 하나라는 소문이 돌자 몇몇 사정기관이 확인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의 야심 찬 카드였던 김태호 후보가 낙마하고 우여곡절 끝에 김황식 총리가 임명되자 청와대 내에선 박 대표를 향한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일각에선 ‘박지원 부통령’이란 자조 섞인 말도 나왔다는 것. 복수의 청와대 인사들에 따르면 이 대통령 역시 박 대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대선캠프 출신인 여권의 한 고위 관료는 “(이 대통령이) 한나라당이 과반(의석)을 넘긴 상황에서 왜 야당 원내대표에게 끌려 다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정보 유출에 대해서도 언성을 높인 것으로 안다”면서 “박 대표가 야당이긴 하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너무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 하는 기색도 내비쳤다”고 전했다.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는 박 대표와의 ‘정면대결’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더 이상 박 대표에게 휘둘릴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수도권의 한 친이계 의원은 “지금은 그럭저럭 방어도 하고 역공을 취하고 있지만 집권 말기엔 박 대표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 레임덕으로 인해 고급 정보들이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대비해 꾸준히 ‘소스’를 모으고 있다는 첩보도 있다”면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청와대 내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몇몇 비서관들이 박 대표 입지를 약화시켜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일단 당이 박 대표와 잘 협의해 국회를 이끌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어차피 정권을 놓고 싸워야 할 상대라면 어느 정도 기선은 제압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일부 인사들의 판단”이라고 귀띔했다.
이와 관련, 최근 몇몇 사정기관들이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자치단체장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박 대표가 최종 ‘타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사정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박 대표와 가깝다. 이명박 정권의 ‘공공의 적’인 박 대표를 잡기 위한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고 말했다. 검찰을 비롯한 사정기관 안팎에서는 여권이 ‘플리바게닝’(수사에 협조해줄 경우 형을 감면해주는 제도)을 이용해 ‘대어’(박 대표)를 낚으려 한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 고위 인사는 “그런 일은 없다. 수사는 원칙대로 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정치권과 사정기관 관계자들의 전언을 종합했을 때 현재 3명의 호남단체장들이 수사선상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A 시장은 한 중소업체로부터 사업 입찰과 관련해 수억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A 시장 측근으로부터 이러한 진술을 듣고 구체적인 물증도 확보한 상태다. 검찰은 B 시장이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불법선거를 했다는 첩보도 입수, 내사에 들어갔다. 또한 B 시장이 공천을 받기 위해 로비를 벌인 정황도 포착됐다고 한다. 특히 B 시장은 박 대표의 측근 인사로 알려져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C 시장은 대형 사업을 유치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 지원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 규모가 비교적 커 정치권에선 ‘게이트’로의 확산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3명 모두 박 대표와는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민주당은 수사가 확산돼 자칫 박 대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에게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박 대표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지난 2003년 특검까지 받았던 대북송금사건도 그중 하나다(<일요신문> 955호 참고). 특히 검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최근 전 방위적으로 대기업 사정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한화그룹 비자금 사건을 신호탄으로 현재 사정기관에서는 여러 그룹들에 대해 내사를 진행 중이다. 이 가운데 일부가 야권 인사들이 연루된 의혹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박 대표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을 것이란 얘기가 사정기관 관계자들을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아직까지는 참여정부 시절에 있었던 특혜와 불법로비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정권에 미운털이 박힌 박 대표도 언제 (리스트에) 오를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관측들에 대해 여권핵심부는 ‘민주당과 박 대표 측의 확대해석’이라는 입장이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단체장들 비리 수사는 사정기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청와대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다. 박 대표가 껄끄러운 것은 분명하지만 야당 원내대표라는 지위를 감안하면 이해도 된다. 박 대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낭설”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윤호석 정치연구소의 윤호석 소장은 “지금 여권엔 박 대표와 붙어서 이길 만한 정치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 박 대표 심기를 거스르면 여권으로서도 좋을 게 없어 보인다. 만약 박 대표를 염두에 두고 단체장들에 대한 내사를 벌였다면 최대한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라면서 “다만 박 대표 역시 어느 정도 몸은 사릴 수밖에 없을 듯한데 여권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 관계자 역시 “여러 공직 후보자를 낙마시키며 도덕성을 강조했던 박 대표가 도대체 얼마나 깨끗한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라며 여지를 남겼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