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 보탤 거지? 박근혜 전 대표와 민주당이 ‘4년 중임제’ 뜻을 같이 하고 있어 개헌 추진 공조가 이뤄질지 주목되고 있다. |
반면, 후반기 국회에서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 온 여권 핵심부는 지방선거 참패 이후 그 동력을 잃어버렸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야권 일각에서 현 정권 주도하에 이뤄지는 개헌을 ‘국면 전환용’으로 비난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후반기 국회에서 4대강 사업과 함께 가장 뜨거운 이슈로 꼽히는 개헌을 둘러싼 정치세력 간 이해득실을 따라가 봤다.
1987년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을 손질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은 여야 할 것 없이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상태다. 지난 2007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과 총선 주기를 일치시키고 권력구조를 4년 중임제로 바꾸는 이른바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하며 불을 댕겼고, 당시 국회는 치열한 공방 끝에 대선을 치른 뒤 18대 국회에서 처리하자고 합의한 바 있다. 그 이후 정치권은 지난 2008년 국회의원 186명이 참여한 미래헌법연구회를 설립, 개헌을 위한 연구 및 여론 수렴에 나섰다. 지난해 8월엔 국회의장 직속 자문기구인 헌법연구자문위원회(위원장 김종인)가 ‘개헌 보고서’를 만들어 이원집정부제와 4년 중임제로 권력구조를 바꾸는 두 가지 개헌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주류가 개헌에 적극적이었다. ‘임기 내 개헌’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던 이 대통령은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선거제도와 행정구역 개편을 언급하며 개헌 추진을 시사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엔 “통치 권력이나 권력 구조 개편으로 제한하자”는 보다 발전된 로드맵을 제시했다. 이 대통령이 개헌 논의에 앞장서자 여권 핵심 인사들이 이를 지원사격하고 나섰다. ‘왕의 남자’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은 올 초 “금년 말까지는 (개헌을) 해야 한다”고 밝혔고, 안상수 전 원내대표와 정몽준 전 대표 역시 지난 4월 “지방선거 후 개헌에 착수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여권 주류는 개헌을 집권 후반기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고 지방선거 이후 본격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주호영 특임장관이 지난 2월 “대통령으로부터 ‘지방선거 뒤쯤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이뤄져 정부 의견을 조율해 올 것이니 준비를 하고 있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언급한 대목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우선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 개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개헌을 차기 대권과 연관 지어 바라보는 여야 잠룡들과 각 계파들은 견해 차이만 보였을 뿐 그 간극을 쉽게 좁히지 못했다.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선 모두들 인정했지만 그 시기와 방법을 놓고서는 뜻이 달랐던 것이다. 차기 ‘영순위’ 박근혜 전 대표는 친이계의 이원집정부제 방식이 아닌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로의 개헌을 원했다. 수도권 지역 한 친박 의원은 “유력 주자가 없는 친이계로선 차기 대통령의 힘을 분산시키길 원할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역시 여권의 개헌 움직임에 대해 “대통령이 진두지휘하고 국회의장이 추진하며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밀어붙이는 형국”(이강래 전 원내대표)이라며 그 의도를 의심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이번에도 개헌 논의가 ‘변죽만 울리고 말 것’이란 의견이 확산돼갔다.
특히 6·2 지방선거가 한나라당 참패로 끝나자 개헌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는 관측이 팽배했다. 개헌의 선봉장에 설 것이 유력하던 청와대는 당·정·청 쇄신 작업에 ‘올인’하다시피 하고 있고, 친이계 역시 당권 경쟁 이외의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세종시 수정안 못지않은 거센 반발이 예상되고 있는 4대강 사업에 여권 핵심부가 전력을 집중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개헌이 힘들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다. 재선에 성공한 김문수 경기지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안 되는 개헌을 하다 보면 힘만 빠진다. 이 대통령 레임덕이 촉진될 것이라고 본다”며 개헌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이 대통령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한 고위 관료는 “무리해서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솔직히 지금 추진할 경우 그 뒷감당을 하기 어렵다. 내부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개헌이냐. 전략적 후퇴라고 보면 된다”고 털어놨다. 이재오 위원장의 한 측근 역시 “올해 하반기에 시작해서 내년 초에 (개헌을) 마무리 짓는 것이 시기적으론 가장 적당하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 재·보선도 승산이 희박한 것으로 나오는데 우리가 밀어붙이는 개헌이 국민들과 학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민주당은 김무성 원내대표의 개헌 필요성 발언이 나온 이후 지방선거 패배를 희석시키려는 불순한(?) 목적이 있다며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친박계 내부에서 박 전 대표가 개헌 논의를 적극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면서 꺼져가던 개헌의 ‘불씨’는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표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한 의원 보좌관은 “친이계가 주도했던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했을 경우 우리는 개헌에 대해 입장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선거에서 이긴 친이계가 그 여세를 몰아 이원집정부제를 강행하면 아마 세종시보다 더한 대립이 있었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선거에서 패한 이후 개헌 문제가 쏙 들어가 버렸다. 김무성 원내대표의 발언도 원론적인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일부 친박 의원들과 전략가들이 복잡하게 얽힌 개헌 방정식을 풀기 위한 새로운 해법 찾기에 나섰고, 박 전 대표가 직접 나서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들어 박 전 대표의 새로운 최측근으로 떠오른 경북 지역의 한 의원이 동료 의원들과 정치권 원로들을 만나며 의견을 구하는 한편, 개헌에 대한 친박의 입장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의도에선 박 전 대표가 얼마 전부터 김종인 헌법연구자문위원회 위원장과 이병기 여의도연구소 고문을 수시로 접촉하면서 개헌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그동안 개헌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친박이 이처럼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배경엔 박 전 대표의 비선라인과 자문그룹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들은 박 전 대표에게 개헌 논의를 이끌어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부각시켜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박 전 대표 자문그룹의 한 교수는 “전반기 국회에선 세종시가 제일 큰 현안이었고, 후반기 국회에선 4대강을 놓고 여야가 대립각을 세울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두 사안은 모두 이 대통령이 먼저 공론화한 것들이다. 박 전 대표가 사사건건 이 대통령 발목을 잡는다는 집토끼(전통적인 한나라 지지층)들의 비난을 우려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개헌 문제는 다르다. 개헌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아젠다를 먼저 제시하고 합의를 도출해내면 차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고, 이를 본 박 전 대표가 상당히 흡족해했다”고 털어놨다. 비공식적으로 박 전 대표를 보좌하고 있는 한 인사는 “친이계가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을 때 우리가 선수를 치는 것”이라면서 “보수색채가 짙은 박 전 대표가 정치개혁에 팔을 걷고 나서면 진보 지지층이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정치권은 친이계의 개헌 추진에 대해선 의심의 끈을 놓지 않던 민주당이 친박과는 보조를 맞출 가능성이 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6월 15일엔 정세균 대표가 “개헌 논의 자체를 거부할 생각은 없다. 한나라당이 통일된 안을 가지고 오면 응할 것”이라면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또한 정 대표는 “우리당 당론은 4년 중임제이고 나도 선호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박 전 대표가 원하는 권력구조 개편 방식과 일치한다. 더군다나 민주당은 지난해부터 지방선거 이후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어 시기를 문제 삼아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윤정치연구소의 윤호석 소장은 “민주당으로선 개헌을 하는 것이 고 노무현 대통령의 기치를 계승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면서 “어차피 (개헌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뜻이 같은 친박과 손을 잡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이어 윤 소장은 “친박계가 개헌에 대해 뜻을 바꾸기로 결심한 데에는 민주당이 힘을 보태줄 것이라는 판단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세종시 사례에서도 보듯이 친박과 민주당이 손을 잡으면 개헌에 있어서 친이 주류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