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일주일간의 입원치료를 끝내고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김홍일 의원에 대한 소환 가능성이 흘러나오던 지난 16일 민주당 동교동계 한 의원은 다짜고짜 역성부터 냈다.
“나라종금 사건으로 함께 불려간 염동연이는 바로 구속되고, 2억원을 받은 것이 확인된 안희정이가 풀려나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나. 그래놓고 이제는 한광옥 실장을 구속시키고….
두 아들이 사법처리된 마당에 하나 남은 장남까지 구속시키려 드는데, 이거야 원…. 최재승이도 소환한다지? 잡겠다고 달려 드는데야 힘 빠진 우리가 당할 수밖에. 그래도 이것은 정도(正道)가 아니야. 누가 봐도 보복이지.”
내우외환(內憂外患). 민주당 동교동계 출신 인사들의 요즘 처지가 꼭 그렇다.
당 내부에서는 신주류 중심으로 신당 창당 논의가 전개되면서 퇴출 대상으로 지목돼 ‘내우’에 시달리고 있고, 검찰의 비리수사가 진행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동교동계 출신 인사들이 줄소환되면서 ‘외환’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검찰의 칼끝이 자신들을 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전개된 일련의 검찰 수사는 이전 정권에서 저질러진 부패·비리 척결이라는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염동연 구속, 한광옥 구속, 최재승, 김홍일 소환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동교동계 죽이기’라는 ‘표적수사’ 시비를 부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권력무상을 실감하고 있는 김대중 전대통령 측근 인사들은 ‘앉아서 당하느니, 서서 죽겠다’며 노무현 정권과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나라종금 사건으로 염동연 전 특보에 대해 구속이 집행된 지난 4월30일. 기자와 안면이 있는, 연청 고위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격앙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 염 선배를 통해 도움을 요청한 것이 엊그제인데, 대통령에 취임했다고 이렇게 하루아침에 내칠 수 있는 것이냐. 가만두지 않겠다. 경선과 대선 때 어떤 도움을 어떻게 줬는지 낱낱이 공개하겠다. 필요하다면 내 실명을 거론해도 좋다.”
1년 이상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지만 하루아침에 ‘팽’당한 염동연씨에 대한 연민이 강하게 묻어났다. 그러나 ‘실명공개’까지 호언했던 이 인사는 다음날 차분한 목소리로 ‘(공개를) 조금 뒤로 미루자’고 했다. ‘염동연씨 구속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며 ‘당할 만큼 당한 뒤에 보자’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광옥 최고위원이 구속됐고, 최재승 의원도 소환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급기야 검찰 수사는 연청 명예회장을 지낸 김홍일 의원을 향해 치닫고 있다.
▲ 김홍일 의원 | ||
아직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특검 수사와 장남 김홍일 의원의 소환 소식에 공식적인 언급은 없는 상태다. 그러나 동교동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전언이다.
지난 5월 초 동교동을 방문했던 한 인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많이 수척해지셨다”며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특검이다 검찰수사다 뭐다 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이 인사는 “뭔가 대책을 세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며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최근 동교동을 찾았던 또 다른 인사는 “장남(김홍일 의원)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신 것 같았다”며 “별다른 말씀은 없었지만, 김 의원 얘기가 나오니까 얼굴이 굳어졌다”고 전했다.
‘동교동’이 비교적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교동계 인사들의 움직임은 차츰 빨라지고 있다.
이들은 신주류 중심의 신당 창당 논의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 모임을 갖고 있지만, 검찰의 수사방향은 물론 향후 정치적 진로까지 함께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남 출신의 한 동교동계 의원은 “이제 막가자는 거지?”라고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과의 대화에서 사용한 용어를 빗대며, “작용이 있으면 자연스레 반작용이 뒤따르는 법”이라며 모종의 반격카드를 준비중임을 암시했다.
또 다른 전남 출신 의원은 “권력은 대통령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며 “신주류가 아무리 날뛰고, 우리를 구태 정치인으로 몰아도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설혹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되고, 종국에 가서는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심판받는 것”이라며 “인적청산입네, 신당입네 하면서 자기들끼리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모습을 국민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이 ‘개혁’을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착각하고 있는데, 한번 차분히 따져보자”며 “그들이 70년대와 80년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처음(96년) 공천을 받을 때는 또 어떠했으며, 지난 2000년 총선에는 또 어떠했는지….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의 모습은 미래에도 투영되는 법”이라고 불쾌한 심경의 일단을 드러냈다.
이 전남 출신 의원의 얘기 속에는 은연중 동교동계가 준비하는 노 정권과 신주류에 대한 ‘반격카드’의 밑그림이 녹아 있는 셈이다.
▲ DJ 퇴원 하루 뒤인 지난 17일 오후 서울공항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방문 귀국보고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무현 대통령의 한 핵심측근은 “호남인의 정치의식은 높다”고 전제한 뒤 “(호남 사람들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선 DJ나 동교동에 의지해 정치무대에 참여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새로운 정당이 탄생하고 새 인물을 전면에 포진시키면 상당수가 지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인사는 “호남 민심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지 않고, 확실한 대안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일부 구태 정치인들은 (신당에) 따라오지 말고 당에 남아줘야 한다”고도 말했다.
민주당의 한 중도파 의원은 “그간 신주류 일각에서 ‘동교동계’와 ‘동교동’ 분리 방안을 모색해 온 것으로 안다”며 “이는 아직도 호남정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DJ와 구주류로 지칭되는 동교동계 인사들을 떼어놓음으로써 구주류만의 민주당에 ‘김심’(DJ의 뜻)이 실리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의원은 “최근 검찰이 김홍일 의원의 최측근인 정학모씨를 구속하고 김 의원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까지 내비치고 있는 현실로 볼 때 DJ와 동교동계가 다시 운명공동체로 뭉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정씨는 김홍일 의원의 대학선배로 30년 가까이 특별한 인연을 맺어온 인물로 DJ와 아들들의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정가 일각에서는 정학모씨의 구속에 김홍일 의원과 DJ를 압박함으로써 동교동계의 ‘저항 엔진’을 잠재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한 민주당 관계자는 만약 정씨의 구속에 ‘DJ 압박용’ 메시지가 담겨 있다면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예측했다. 호남인의 친 DJ정서를 자극하면 할수록 동교동계의 입지가 탄탄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라종금으로 시작된 검찰의 전방위적인 사정의 칼날은 시간이 흐를수록 김대중 전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목을 죄고 있는 모습이다. 더욱이 신당 창당이라는 새로운 권력지형 재편과정이 맞물리면서 김 전 대통령의 가신과 측근으로 대변되는 동교동계는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배수의 진을 치고 칼날을 부여잡고 반격을 노리고 있는 동교동계 인사들과, ‘떼놓고 가겠다’며 칼자루를 고쳐잡고 신당을 향해 총총걸음을 내딛고 있는 노무현 정권의 이너서클.
이들 간 마지막 ‘대회전’은 ‘김홍일 변수’에 따라 신기남 의원의 언급처럼 어쩌면 ‘선혈이 낭자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