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에 따르면 지난 2007년 3월 회장 취임 이후 2009년 유임돼 내년 2월까지 임기를 남겨두고 있는 조석래 회장의 사퇴는 건강 악화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조 회장은 7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지만 지난 6월 수술을 받으면서 회장직 수행이 더 이상 어려울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일각에선 조 회장이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한 국내·외 일정을 소화해내다 건강이 악화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조 회장 사퇴 배경에 아들들의 검찰 수사에 대한 부담감이 깔려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조 회장 장남 조현준 사장과 삼남 조현상 전무는 회사 돈 횡령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친인척 권력형 비리 엄단 의지를 밝힌 까닭에 대통령 사돈인 조석래 회장이 느꼈을 부담이 더 컸을 것이란 관측도 덧붙여진다.
조 회장과 더불어 효성그룹을 이끌어온 조현준 사장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만큼 그룹 경영 차질도 예상된다. 조 회장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후계 작업이 빨라질 수 있는 시점에서 조현준-조현상 형제에 대한 검찰 수사가 효성 경영권 승계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로 떠오른다.
이런 효성 내부의 고민도 작지 않지만 갑작스레 선장을 잃은 전경련의 고민은 더 클 듯하다. 후임 회장에 나설 마땅한 인사가 없는 까닭에서다.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4대 재벌 총수 중 한 명이 전경련을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4대 그룹 총수들 모두 전경련 회장직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재계 서열 1위 삼성의 이건희 회장, 2위 현대·기아차의 정몽구 회장 측은 이미 “전경련 회장에 뜻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지난 2007년 초 강신호 당시 전경련 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전경련을 맡기기 위해 추대 의사를 밝혔지만 이 회장이 극구 손사래를 친 바 있다. 지난 2008년 4월 삼성 쇄신안 발표로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 3월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은 당분간 삼성 경영에만 몰두하겠다는 입장이다.
전경련 회장직이 마뜩치 않기는 정몽구 회장도 마찬가지다. 회장 선임이 여의치 않을 경우 회장단 가운데 연장자를 추대했던 전례 때문에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과 더불어 1938년생으로 최고령자급에 속하는 정 회장이 후보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경련에서 정 회장 추대 논의에 불을 지피기도 전에 현대차는 “정 회장은 현대·기아차 경영에 전념할 것”이란 입장을 밝힌 상태다.
재계 서열 3위 SK의 최태원 회장은 다른 회장단 멤버들에 비해 너무 젊다는 점이 걸린다. 1960년생인 최 회장은 전경련 회장단 멤버 중 막내다. 1999년 반도체 빅딜로 반도체 사업을 접어야 했던 재계 서열 4위 LG의 구본무 회장은 전경련과 담을 쌓은 지 오래다.
이렇듯 4대 그룹 총수들이 여의치 않다 보니 연장자 승계 전례에 따라 이준용 명예회장이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명예회장은 지난 2007년 3월 조석래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에 오를 당시 전경련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70대 불가론’을 내세운 전력이 있다. 당시 72세였던 조석래 회장(1935년생)을 겨냥해 70대 불가론을 외쳤던 이 명예회장은 올해 72세가 돼 있다. 자신이 했던 말을 뒤집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제외하고 나면 전경련 회장단 시니어급 중에선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1941년생), 박용현 두산 회장(1943년생), 허창수 GS 회장(1948년생), 정준양 포스코 회장(1948년생) 등이 눈에 띈다.
박영주 회장은 다른 재벌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고 있고, 박용현 회장은 의사 생활을 하다가 지난 2007년부터 그룹 경영에 참여한 터라 경영자 단체를 대표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평이 따른다. 허창수 회장은 그동안 대외 활동 면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점, 정준양 회장은 오너가 아닌 임기제 회장이란 점이 걸린다. 그러나 후임자 선정 작업이 난항을 겪는 와중에 이들 중 회장직을 원하는 인사가 나타날 경우 전격 추대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어 조양호 한진 회장(1949년생), 현재현 동양 회장(1949년생), 김승연 한화 회장(1952년생), 신동빈 롯데 부회장(1955년생), 이웅렬 코오롱 회장(1956년생) 등도 전경련 회장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다. 이들 중 신동빈 부회장과 이웅렬 회장은 “너무 젊다”는 평가 속에 지난 2007년 강신호 당시 회장의 후임 물망에 올랐던 조양호 현재현 김승연 세 사람에게 눈길이 쏠린다.
2007년 당시 강신호 회장 후임자 추대를 위한 전경련 회의에서 이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그 사람 너무 어리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내심 연임을 원했던 강신호 회장, 전경련 회장 자리를 노린 조석래 회장, 이를 견제하려 했던 이준용 명예회장 등 노장들의 기싸움 속에서 세대교체론이 묻히고 말았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인다. 다만 세 사람에게도 나름의 장애물은 있다.
조양호 회장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을 맡아 해외활동에 분주한 상태다. 현재현 회장의 동양은 재계 서열 30위권 밖이라 “힘 있는 회장을 추대하자”는 최근 움직임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김승연 회장은 지난 2007년 보복 폭행 사건으로 비롯된 돌출행동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 이처럼 주요 재벌가 명단을 꼼꼼히 들여다봐도 ‘딱 들어맞는’ 후보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재계의 여러 관계자들은 “조석래 회장이 2007년 전경련 회장으로 나설 당시 대통령 사돈기업 오너란 점에서 여론의 견제를 받았지만 후보 찾기에 급했던 당시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조 회장을 추대했다”면서 “어느 정도 걸림돌이 있는 후보라도 자원하고 나서주기만 하면 회장단에서 몰표를 보내주려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전경련 회장 추대 작업이 초기엔 난항을 겪겠지만 어느 순간 급물살을 탈 수 있다는 관측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