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쏜다>의 한 장면. |
지난 6월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은 직급’에 대한 한 설문조사에서 60%에 가까운 직장인들이 ‘대리급 이하’라고 답했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루는 만화를 살펴보면 실제로 대부분 대리가 그 주인공이다. 그만큼 직장생활의 애로사항에 대해서 누구보다 먼저 느끼는 최전방 직급이 대리다. 중소 외식업체에서 근무하는 H 대리(여·30)는 상사의 잔일거리를 도맡아 하는 데다 후배가 없어 고생이다.
“업종의 특성상 영업·관리 쪽 인원은 많은데 저희 기획마케팅팀에는 인원이 늘 모자라요. 하지만 신입사원을 뽑아도 금세 나가버려서 대리 직급에 신입들이 하는 일까지 하고 있어요. 상사도 새로운 신입에 대한 기대를 버렸는지 적극적으로 인원을 채우려고 하지도 않죠. 저는 힘들어 죽겠는데 큰 사고 안 터지니까 혼자서도 가능한 걸로 비치나 봐요. 그렇다고 일부러 사고를 칠 수도 없고, 매일 얼굴을 구긴 채 회사에 가게 되네요.”
H 대리는 신입을 뽑아도 믿을 수 없다며 일을 시키지 않는 상사 때문에 골치를 앓기도 했다. 늘 자신에게 직접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한다는 것. 그는 “신입이 할 일부터 모두 처리하려니 힘에 부친다”고 털어놓았다. 중소기업 총무팀에 근무하는 C 대리(여·29)도 승진한 후 흰머리만 늘었다고 푸념이다.
“대리 3년차인데요. 입사해서 기획팀에 있을 때는 막내라서 큰 프로젝트가 주어지진 않았지만 나름 전문직 같다는 생각도 들고 괜찮았어요. 총무팀으로 옮기고 얼마 뒤 대리가 됐는데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월급이 많이 오른 것도 아닌데 할 일은 태산입니다. 자질구레한 것부터 성가신 일까지 끝도 없어요. 제가 내린 결론은 ‘총무팀 대리=엄마’라는 겁니다. 대표 집에 설치할 오디오 시설부터 컴퓨터 사양까지 체크해서 구입해야 하고 얼마 전에는 이사할 때 이사 짐 정리까지 하고 왔어요.”
C 대리는 요즘 들어 개인의 비전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 그는 “일이 많더라도 스스로 능력을 키우고 발전한다는 뿌듯함이라도 느꼈으면 좋겠다”며 “대리 되고 잠깐이나마 좋아했던 시절도 다 옛날”이라고 말했다. 대리는 일복이 터진 직급이다. 위에서 할 일, 아래서 할 일 모두 대리에게로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류회사에 근무하는 K 씨(31)는 대리 2년차에 일이 너무 많아 거품을 물 지경이다.
“가뜩이나 업무가 많은데 상사 덕분에 일감이 폭발 지경입니다. 간부들한테 잘 보이려고 회의에 가면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우리 부서에서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일감을 가져오면 무조건 저만 불러서 맡깁니다. 말단일 때는 시키는 일 하면서 적당히 자기계발을 할 시간도 있었는데 대리 달고 그런 시간은 꿈도 못 꿉니다. 처음에는 인정 좀 받아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죠. 그랬더니 더 많은 일이 떨어지더군요. 총무팀에서 자료요청이 와도 K 대리, 관리팀에서 연락이 와도 무조건 K 대리…. 이젠 많이 벅찹니다.”
회사에서 가장 많은 업무를 처리하는 직급이다 보니 이에 따른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병원신세를 지기도 한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J 대리(31)는 얼마 전 폭발 직전의 스트레스로 탈모와 심리적인 불안상태를 겪다가 신경정신과를 찾았단다.
“잦은 야근과 피로에 시달리다 보니 신체적인 이상 증세를 넘어서 약한 원형탈모까지 오더군요. 특히 업무 부담에서 오는 불안이 계속돼서 결국 신경정신과를 찾았는데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한 약한 조증(躁症) 진단을 받았습니다. 심해지면 울증(鬱症)까지 와서 망상이나 환상도 겪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살 위험성도 높아진다는 소리에 아차 싶었습니다. 식사도 불규칙하고 지나친 술 담배에 매일 잠도 부족했고 운동은 1분도 하지 않으니 몸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긴 거죠.”
이 같은 ‘지옥의 대리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대기업 입사 7년차인 L 대리(35)도 이제 ‘대리 딱지’ 좀 떼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과장, 부장급이 하는 프로젝트까지 다 소화하고 있어요. 과장 승진이 임박한 것 같긴 한데 아직 그 고비를 못 넘고 있네요. 만년 대리 소리 이제 그만 좀 듣고 싶어요.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친구가 있는데 현재 과장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아직도 대리냐며 면박을 주는데 정말 창피하더군요. 일은 일대로 하고 밖에 나가서 어깨 한 번 못 펴니 직장생활이 재미없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영업업무 특성상 체면치레로 진급이 빨랐던 건 있죠. 하지만 그는 과장이고, 저는 대리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씁쓸하더라고요.”
출판회사 디자인팀에 근무하는 O 씨(여·34)는 ‘과장 대우 대리’라는 직급이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다. 과장도 아닌 것이 대리도 아니고 일만 많아졌단다.
“대리 4년차에 과장 대우 대리가 됐는데요, 과장 대우라고 해서 업무가 줄거나 딱히 연봉이 크게 늘어난 건 아니에요. 일은 대리 때보다 많아졌는데 일 터지면 과장 대우라고 책임까지 져야 돼요. 그냥 대리일 때도 일이 확 늘어서 힘들었는데 그래도 차라리 그때가 더 낫네요. 디자인에 문제 생기면 다 제 책임이어서 신경 쓸 건 많은데 이에 합당한 금전적, 정신적 보상이 없으니까 일할 의욕이 안 생기죠.”
O 씨는 내년 연봉협상 때 과장 승진과 연봉 인상이 되지 않으면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할 생각이다. 그는 “길고 험난했던 대리 딱지 좀 떼나 했더니 그것도 여의치 않다”며 “대리 되고 최근 4년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많은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견디면서 회사를 다닌다. 특히 숙련도가 높은 대리 직급이 받는 정신적인 압박은 더 크다.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과중한 업무와 만성피로로 인한 스트레스를 방치하면 각종 성인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며 “되도록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적절한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런 처방전을 알아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대리들의 삶이 아닌가.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