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다피. 연합뉴스 |
과연 수교 30년을 맞고 있는 한국과 리비아의 외교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양국의 외교전쟁 이면에 감춰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들여다봤다.
한국과 리비아의 외교 마찰 정점에는 국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주 리비아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던 국정원 소속 서기관 전 아무개 씨가 지난 6월 초 리비아 당국에 체포되면서 양국의 외교 마찰이 수면위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전 씨는 외교관 신분이라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6월 18일 리비아 당국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리비아는 전 씨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지만 현지 언론들은 전 씨가 카다피 국가원수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첩보를 수집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리비아는 또 전 씨를 체포해 조사한 직후인 지난 6월 15일에는 현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구 아무개 씨를 불법 선교 혐의로 구속했다. 이틀 후인 6월 17일에는 구 씨를 금전적으로 도왔다는 이유로 현지 농장주 전 아무개 씨를 구금했다. 리비아에서 한국인 선교사가 불법 선교 혐의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에 대한 리비아 당국의 불편한 심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국정원 직원의 정보 수집 활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평상시 해오던 북한 관련 정보 수집 활동이었다”고 리비아 측에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리비아 당국은 ‘금기시된 영역 침범’ 내지는 ‘간첩활동’을 한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는 분위기다.
▲ 지난 7월 30일 금요일 오후인데도 문이 굳게 닫힌 서울 이태원의 주한 리비아 경제협력사무소.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하지만 일부 현지 언론들은 전 씨의 정보 수집 활동이 ‘통상의 범위’를 넘어 ‘간첩활동’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고, 전 씨뿐만이 아니라 국정원 차원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정보 수집이 중장기적으로 진행돼 왔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현지 일각에서는 리비아 내에서는 금기영역인 카다피 국가원수 주변과 세습 관련 정보를 건드렸다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리비아 후계 1순위로는 카다피의 차남인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38)가 꼽히고 있다. 오스트리아와 영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재목으로 알려진 차남은 2003년 12월 리비아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결정할 때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 서방파로 분류되고 있는 그는 변화를 강조하면서 정부 비판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쟁자인 4남 무타심 빌라 카다피(36)는 리비아군 중령 출신으로 보수 성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리비아의 공안·정보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4남은 지난해 4월 리비아 국가안보보좌관 자격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회담하는 등 활동무대를 국제사회로 넓혀가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차남으로 굳어지던 리비아 후계구도에 이상기류가 감지됐다고 한다. 당시 리비아 정부가 차남이 설립한 민간 TV채널의 운영권을 회수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10월에는 차남이 카다피가 공개적으로 제안한 권력서열 2위 자리를 거부하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현재 리비아에선 카다피의 차남과 4남 간에 후계를 둘러싼 권력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정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정원 직원 사건이 이처럼 확대된 것은 권력 승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빚어지고 있는 리비아 내부 사정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현지 일각에서는 국정원 직원 전 씨가 최근 카다피의 후계자로 급부상한 4남 측에 줄을 대려다 리비아 정보당국의 오해를 산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리비아 당국은 전 씨가 카다피 관련 정보를 수집했는지 여부와 맞물려 이 정보를 미국이나 이스라엘에 넘겼는지 여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현지 언론들은 “한국 국정원 직원이 카다피의 국제원조기구와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조직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였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카다피가 운영하고 있는 국제원조기구의 책임자는 차남이고, 4남은 다양한 정보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리비아 일부 언론은 전 씨가 카다피 일가와 관련한 첩보 활동을 전개했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란 다소 억지스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정원 직원인 전 씨의 첩보활동은 비단 한국 정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제3국의 국익과도 연결돼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보도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기자와 만난 정보당국의 한 관계자는 “전 씨의 정보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양국의 외교 마찰을 야기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정보활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특히 채집한 정보를 임의로 미국 등 제3국에 넘기는 행위는 국정원 요원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원칙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전 씨가 대북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리비아 당국의 오해를 살 수 있는 활동을 했을 개연성은 배제할 수 없다”며 “리비아 당국이 전 씨를 비롯한 전임자와 주변 인사들을 대상으로 전 방위적인 조사를 펼치면서 그를 계속 붙잡아두지 않고 추방한 것은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에 대한 혐의나 물증을 잡지 못했기 때문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외교부 관계자들은 한국과 리비아의 외교 관계가 악화된 것은 비단 이번 사건 때문만은 아니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오래전부터 한국 정부에 쌓인 리비아 당국의 해묵은 감정이 국정원 직원의 정보수집 활동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리비아 정부의 이상 징후를 포착한 우리 정부도 고위급 인사를 잇달아 리비아에 급파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5월 퇴임을 한 달여 남겨둔 박계동 당시 국회사무총장이 리비아를 방문했고, 7월 6일부터 13일까지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리비아를 급히 방문한 바 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렇다 할 방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리비아 정부의 홀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총장의 경우 술래이만 알샤오미 총인민회의 외교분과위원장을 예방한 자리에서 한국 언론이 카다피 국가원수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과 관련해 강한 항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는 이 대통령의 친형으로 여권의 핵심 실세로 통하는 이 의원도 ‘문전박대’할 정도로 한국 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이 의원의 리비아 방문 배경 및 목적을 둘러싼 의혹도 증폭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 의원의 리비아 방문 목적에 대해 각종 철도사업 등을 비롯한 한·리비아 경협 확대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 관계자들은 양국 간의 외교 마찰이 심화되고 있는 민감한 시점에 ‘대통령 형님’이 직접 리비아를 방문한 배경에는 분명 말 못할 속사정이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