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 집권 초반기 YS 역시 DJ와의 ‘연합’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 신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두 사람은 완전히 등을 돌리 고 말았다. 사진은 98년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회담. | ||
두 사람이 화해하고 협력했다면 DJ정권은 소위 영·호남 개혁세력이 합치는 ‘민주대연합’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랬다면 고질적인 여소야대 정국, 소수 호남정권의 한계 등으로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뿌리깊은 지역감정을 허물고 한국정치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으로 재편되는 이상적 정치구도가 가능했었다.
정치 9단들이 이 같은 ‘상생의 길’을 몰랐을 리는 없다. 실제로 DJ-YS간의 관계개선 노력은 수 차례 시도됐으나 좌절되는 등 숨겨진 곡절이 많다. DJ를 ‘독재자’로 몰아붙이며 수시로 독설을 퍼붓던 YS와, 이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던 DJ의 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정치과정에 불과하다.
DJ가 집권에 성공했던 직후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YS는 우호적 태도를 취했다. 한보 사건의 와중에 수감돼 있던 차남 현철씨의 석방이 급선무였다. 때문에 ‘DJ 지지’를 측근들에게 지시하기까지 했다.
DJ가 당선된 직후인 97년 12월 말께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 등 민주계 측근들은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YS의 전화를 받았다. “김대중씨를 도와줘라”라는 YS의 지시였다.
일부 측근들에게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DJ의 발목을 잡으려고 할 테니 잘 협조해줘라”는 식으로 전략까지 짜줬다는 얘기도 들렸다.
DJ도 ‘상도동’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고마움을 느끼면서 현철씨 사면복권을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98년 중순께 박상천 법무장관은 현철씨 문제로 두 차례나 청와대에 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마다 김대중 대통령은 8·15광복절특사 때 현철씨를 사면시킬 수 있도록 검토하라고 당부했다.
당시 청와대의 핵심관계자는 “김대중 대통령은 아들 가진 아버지의 심정으로 YS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민주화 동지로서의 인간적인 연민도 깊다. 민주대연합 같은 정치개혁 측면만 따져서 현철씨를 사면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여권은 현철씨를 광복절 특사 대상에서 제외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현철씨는 당시 재판이 진행중인 미결수였다.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만이 사면 대상에 들었다. 박상천 장관은 이 같은 법리를 들어 끝까지 DJ의 사면 검토에 반대의견을 폈다.
흉흉한 민심도 걸림돌이었다. 초유의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로 인해 YS를 향한 비판여론이 높았던 시기에 현철씨를 사면하는 것은 민심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격이었다.
실제로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 한화갑 국민회의 원내총무 등은 현철씨 사면에 대한 여론을 광범위하게 청취했다. 박 수석은 언론사 간부들을 만나면 종종 “현철이를 사면하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타진하곤 했다. 반응은 분명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잘못하면 YS가 맞을 매를 DJ가 벌게 된다”는 게 주된 의견이었다.
결국 DJ는 98년 광복절 사면 대상에서 현철씨를 제외하게 된다. 또 다른 악재도 겹쳤다. YS의 핵심측근인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이 그해 8월 말에 다시 구속된다.
한보비리 사건의 ‘몸통’으로 구속됐던 홍씨는 98년 1월 검찰의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던 상태였다. 95년 대구방송 인허가과정에서 청구그룹으로부터 수억원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게 재구속된 혐의다.
이때만 해도 YS측에는 대결과 타협 기류가 공존했다. DJ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관계개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98년 8월31일 이인제 의원이 이끌던 국민신당이 국민회의와 전격합당하면서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서석재 김운환 의원 등 YS의 측근 의원들이 국민회의에 합류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서 의원은 DJ측의 화해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차례 상도동 자택을 방문, YS를 설득했다는 후문이다. 이에 YS는 3대 전제조건을 내걸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 99년 6월2일 한보사건과 관련해 서울고법에 출두하는 김현철씨 | ||
청와대와 민주당 수뇌부는 YS의 요구를 최대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DJ가 YS로 인해 정권을 잡았다는 점을 공식 발표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민주계 사정 문제를 털어 내기도 간단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J는 YS와의 협력 가능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타진하려 했던 것 같다. YS도 주판알을 퉁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회의는 98년 11월 서석재 의원에게 부산시지부장 임명 사실을 통보했으나 서 의원은 사양했다. 표면상 이유는 5선의원인 자신이 시지부장을 맡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YS의 지시가 숨어 있었다. “내년 초에 큰 틀의 정치권 움직임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국민회의쪽에서도 한동안 잠잠했던 ‘민주대연합’ 추진설이 다시 흘러나왔다. 국민신당의 합류를 계기로 삼아 한나라당 내 민주계를 집단 영입해 ‘지역통합적 개혁연합’을 성사시키는 큰 틀의 정계개편을 재추진중이라는 언론보도가 쏟아졌다. 서석재 의원은 한나라당 내 민주계 좌장인 최형우 의원의 국민회의 입당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타협은 경제청문회라는 암초에 부딪혀 좌초된다. 초유의 경제위기 책임소재 및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에 문민정부의 수장이었던 YS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문제가 걸렸기 때문이다.
시중 민심은 YS를 청문회장에 세워야 한다는 게 주류였다. 반면 YS는 서면 증언이나 비디오 증언도 절대 할 수 없다는 강경 기류였다. 여권은 절충안을 찾기 위해 암중모색했지만 YS의 구미에 맞는 해법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YS는 철저한 ‘반DJ’로 굳어지게 된다. 수시로 국민회의측의 의원 빼내기를 비난하는 등 DJ를 겨냥한 칼날을 빈번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YS의 한 비서관은 98년 12월 중순쯤 “YS는 신년 초에 기자들에게도 상도동을 개방해 세배를 받을까 생각중이다. DJ가 경제청문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같은 민주화 세력끼리 이런 식으로 하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결국 박정희만 살아남는 것 아니냐. 김광일 실장 등 측근들도 청문회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격노한 YS의 심기를 전하기도 했다.
경제청문회가 끝난 뒤인 99년 1월 국민회의는 상도동의 냉랭한 기류를 현실로 인정하고 자민련과의 합당이라는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는 YS와의 화해, 동교동계와 민주계 간의 민주대연합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99년 2월 초 YS는 김무성 박종웅 등 민주계 의원들을 부른 식사자리에서 DJ를 향해 직격탄을 쏜다.
“DJ와는 40년 동안 평생 친구였다. 항상 내가 그를 도왔다. 그가 나를 도운 적이 있는가. 일본 납치 사건 때 야당 총재인 유진산이 국회에서 발언을 꺼릴 때도 내가 나서 목숨 걸고 발언했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여론조사 1등 나온 보고서를 받고도 이를 막을 위치에 있었던 대통령으로서 아무 것도 안했다. 그것도 결국 도운 것 아니냐. 이회창이 나보고 탈당하라고 했을 때 ‘저 인물은 대통령감이 아니다’라고 생각했고 차라리 김대중이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또 DJ 비자금을 내사한 자료를 갖고 있으면서도 검찰수사를 중단시킨 것도 내가 아닌가. DJ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DJ를 도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내가 죽이겠다. 때를 기다리고 참고 있다.”
YS의 이 같은 발언은 DJ를 향한 최종적인 ‘화해불가’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 옷로비사건의 태풍 속에서도 법무장관에 올랐 던 김태정씨. 그 뒤에는 DJ의 ‘빚’이 있다. | ||
DJ는 98년 5월 말에 몽골 방문에 나서고 그 뒤를 이어 YS는 그해 6월 초 일본을 방문한다. DJ의 몽골 방문기간 중 ‘옷로비’사건의 진상이 속속 터져 나오면서 신문 방송들은 관련 보도로 도배를 했다.
DJ의 기사는 신문 1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청와대측은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뛰는데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DJ는 6월1일 몽골에서의 귀국 직후 가진 여권 4자 수뇌부 회동에서 방송 카메라 기자들을 물리쳤다. 수뇌부 회동에 이어 2일 국무회의에서도 녹취를 위해 들어온 카메라 기자들을 나가게 했다. 이때만큼 DJ가 언론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뒤이어 일본으로 날아간 YS는 10여 일간의 방일기간 내내 DJ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등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YS는 일본 기자들을 모아놓고 DJ를 비난하고는 “내가 아무리 말해봐야 한국신문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YS의 독설은 번번이 방미중인 DJ 관련 기사를 밀어내고 신문의 1면을 차지하곤 했다.
YS는 큐슈대 강연 직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갑자기 “어느 신문 여론조사에서 나의 김대중 비난 발언에 대해 반대 여론이 75%가 나오고, 김태정 처리에 대해 66%가 ‘수사 후 처리’라고 답했다는데 전부 거짓말이다. 한국언론이 이래서야 되겠느냐. 무서운 변을 당할 것이다”라며 DJ와 언론, 김태정 검찰총장 등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다.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을 둘러싸고도 DJ와 YS는 평행선을 달렸다. YS나 그 측근들은 김 총장을 거의 ‘변절자’로 치부했다. 민주계 핵심이었던 김운환 의원은 99년 2월 이렇게 말했다.
“김태정 검찰총장을 임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나다. YS가 김기수 후임을 선임할 때 나를 만났다. ‘누구를 총장으로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보사건을 해결하고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호남 출신이 검찰총장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 전에 김태정씨를 만났는데 자신이 검찰총장이 돼야 하는 이유로 여섯 가지를 들었다. 김태정씨는 당시 부산지검장을 했는데 민주계 중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덕분에 총장이 된 김태정씨가 나를 청구사건에 연루시킨 것을 보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특히 김태정이 나를 청구사건에 연루시키면서 3선 영입파를 잡아넣으면 한나라당에서 반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인간적 배신감을 느꼈다.”
YS도 문민정부 말기에 자신이 기용한 김 총장이 현철씨 사면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계 구속에 앞장선 것에 대한 불쾌감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DJ는 99년 5월 옷로비 사건의 태풍 속에서도 김 총장을 법무장관에 기용할 정도로 아꼈다. 전임자였던 박상천 의원은 “DJ가 김태정씨를 낙마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인간적으로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7년 대선 정국 말기에 터져 나온 DJ 비자금 수사를 김 총장이 유보했다. 그로 인해 마음이 약해진 것이라고 본다”고 해석했다.
DJ와 YS 관계개선의 발목을 잡았던 현철씨 사면문제는 99년 8월15일에 해결된다. 현철씨는 잔여형 집행면제라는 명목 아래 출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DJ와 YS의 화해로 연결되기에는 그동안 파여진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다. 정권도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DJ와 YS 모두 타협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게 된다.
2002년 6월 월드컵 개막식 때도 두 사람의 악연은 되풀이됐다. 당시 청와대 조순용 정무수석이 전직 대통령인 YS의 개막식 초청장을 하루 전날 전달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조 수석 개인의 실수였지만 YS는 분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원 비서실장이 나서서 해명해 YS는 개막식에 참석했지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