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2 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신군부 측에 맞섰던 장태완 전 국회의원의 빈소가 차려진 27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193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장 전 사령관은 대구상고,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광주 보병학교 교관,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 교육참모부 차장 등을 거쳐 1979년 11월 7대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수경사령관)에 올랐다.
장 전 사령관이 지난 1993년에 집필한 <12·12 쿠데타와 나>라는 책을 보면 쿠데타 전후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그가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작전참모를 시켜 파악을 해본 결과 중대장급 이상 간부는 거의 ‘하나회’ 장교였다고 저서에 기술했다. 그는 책에서 당시 ‘하나회’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4년마다 진급하도록 규정한 군 인사법을 무시하고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압력을 행사해 ‘육군인사규정’을 새로 만들어 ‘특별진급’을 시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초법적으로 2년마다 특별진급을 시키는 바람에 군 5년 후배인 전두환이 내가 준장 진급을 한 지 2년 만에 준장 진급을 했어요. 내가 26사단장으로 나갔더니, 나보다 상관 격인 보안사령관이 됐더군요. 그때 사조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1979년 11월 16일 수경사령관으로 취임했는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10·26 사건에 대한 조사를 이유로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해 권력의 주도권을 쥐려 했던 것. 당시 전두환 사령관은 평소 강직한 군인으로 잘 알려졌던 장 전 사령관이 쿠데타에 협조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쿠데타 당일 서울 연희동에 위치한 한 요정에서 그를 비롯한 몇몇 장군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장 전 사령관과 함께 끝까지 쿠데타를 반대한 정병주 장군(당시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등이 함께했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수경사 조흥 헌병단장)가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은 나와 특전사령관 등을 거사 완료 예정시간인 8시 30분까지 술자리에 잡고 있으라는 전두환의 밀명에 따른 공작책이었다. …또 한 가지 내가 놀란 것은 좌중에 배치되어 있는 여인들은 평범한 양장에 화장도 그리 눈에 띄지 않게 하고, 나이도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접대 여인들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요정 대문 안으로 들어설 때 맞아 준 마담이란 여인은 전두환 장군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는 여자였다.”
장 전 사령관이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대통령의 근위부대 격인 경복궁 근처 30경비단에는 쿠데타의 핵심 세력들이 모여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장세동 30경비단장, 김진영 33경비단장 등 수경사의 핵심 지휘관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즉 장 전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야 할 직속부하들이 쿠데타에 합세한 것이었다.
연회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그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공관에서 총격전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사령부로 복귀했다. 그는 사령부로 가자마자 참모장에게 30경비단 측 상황을 보고받았다. 장 전 사령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여기까지 보고를 받는 동안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당장 30경비단으로 달려가서 그들을 박멸하고 싶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러한 분노를 내 스스로 억제하기가 힘들어 보고를 중단시키고 담배를 꺼내 서너 대를 연달아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쁜 놈들, 정치군인으로 안하무인격으로 놀아나더니 이젠 모반까지 해.’”
그는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으나 취임 한 달도 안 된 수경사는 이미 전두환 사령관 측에 포섭된 상태였고, 당시 정부 인사들 중 상당수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장 전 사령관이 1979년 12월 13일 새벽 국방부 장관과 통화한 내용을 책에 담은 것이다.
“야, 장태완! 넌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 “장관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무슨 병력이 있어야 싸우지요. 저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다만 자체 방어태세만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말로 하란 말야.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단 말야.” “피 흘린 것도 없지만 이젠 다 끝났습니다. 병력들이 다 저 쪽으로 넘어가고 여기는 전투병력이 없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병력들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것이 장관님의 명령이라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장관님! 제가 복명복창을 하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상황을 끝내겠습니다.”
장 전 사령관은 결국 쿠데타 진압에 실패하고 신군부 세력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그는 끌려갈 당시 자신이 쿠데타를 진압하려다 패한 사령관이기 때문에 첫 번째로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30년 군 생활을 마감하는 예편서에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6·25 전쟁 발발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군문에 투신하여 3년 전쟁 동안 무수한 사선을 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했던 군생활을, 명예롭기는커녕 12·12의 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불충의 죄인이 되어 반란 주모자들의 강압에 의해 30년 동안 몸담아 왔던 군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서운한 생각이 억장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장 전 사령관의 삶에 유일한 희망이던 성호 씨는 1982년 1월 9일 아침 학교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간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장 전 사령관은 민정당 권정달 사무총장 등에게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튿날인 2월 10일 아들은 경북 왜관읍에서 1㎞ 떨어진 낙동강 인근의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12·12 쿠데타에 반대한 의거가 3대에 걸친 불행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 장 전 사령관은 그의 책에서 “나는 12·12 사태로 인해 그동안 천직으로 알고 자부심을 느껴 온 군대를 떠났을 뿐 아니라, 그 충격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는 그야말로 감당키 어려운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결혼 이후 30여 년 동안 군인의 아내로서 남편을 성실하게 내조하면서 가정을 이끌어 오다가 뜻하지 않았던 12·12 사태로 인해 겪어야 했던 내 아내의 비극과 고통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컸던 것이다”고 회고했다.
그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고 최초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난 1993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소했다. 검찰은 1994년 12·12 사태를 ‘군 형법상의 군사반란’으로 규정했고, 피고소인 전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장 전 사령관은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부세력에 의해 배신자로 낙인찍혀 힘겨운 세월을 인내해야 했지만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통해 결국 역사의 승리자가 됐다. 또한 12·12 쿠데타를 다룬 드라마를 통해 영웅으로 묘사되면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존경받는 군인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당시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는 것이 주변사람들의 전언이다. 실제 그는 생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난 국가와 민족과 역사 앞에 속죄 받을 수 없는 죄인이에요. 이유야 어떻든 자결해도 모자라겠지만, 국가가 맡겨준 수도경비사령관과 비상계엄하의 수도계엄사무소장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속죄를 비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라고 개탄했다.
장 전 사령관은 1995년에 최초로 경선으로 치러진 재향군인회장 선거에 당선되면서 비로소 명예를 회복됐다. 동료 군인들이 그의 당시 행동에 대해 손을 들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고인은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진정한 군인’으로 역사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
12·12 사태 당시 장태완 전 사령관과 함께 쿠데타에 반대했던 장군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이다. 그는 장 전 사령관과 함께 연희동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군사반란 소식을 듣고 긴급히 부대로 돌아와 인천의 9공수여단을 출동시켰고, 신군부 세력이 포진했던 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부대 이동을 지시했다. 그러나 9공수여단은 육참차장이었던 윤성민 중장의 명령으로 회군했고, 그 사이 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3공수여단장 최세창 장군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려 그를 감금했다. 정 전 사령관은 1987년 12·12 군사반란을 재평가하는 운동을 벌이다 1989년 경기도 의정부 인근 야산에서 의문사했다.
장 전 사령관 체포 과정에서 특전사 비서실장 김오랑 전 소령(중령 추서)은 3공수여단 병사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현장에서 전사했다. 김 전 소령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요청으로 국립묘지에 안장은 됐으나, 그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부인도 충격으로 실명한 후 1993년 실족사했다. 현재 고 김오랑 중령 추모 사업회가 보상과 명예회복에 힘쓰고 있지만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 측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연행하자 이에 저항한 김진기 전 육군본부 헌병감은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1980년에 강제로 예편됐다. 그러나 이들 의기 있는 군인들은 ‘평생 군인’으로 세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