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대립각을 세웠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에 화해 기류가 형성될 조짐이 보이면서 여권 내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 사진은 친박계 윤상현 의원 결혼식에 참석한 박 전 대표.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박 전 대표 역시 8·15 광복절 이후 성사될 것이 유력한 이 대통령과의 회동에 대해서 당초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다가 최근 들어선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놓고 정치권에선 20%대 지지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박 전 대표가 본격적인 ‘차기’ 레이스를 앞두고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친박 진영이 은밀히 검토하고 있는 ‘뉴 박근혜 플랜’, 그 실체를 따라가 봤다.
지난 7월 18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 5~6명의 친박 의원들이 모였다. 이 날의 화제는 단연 정진석 의원의 정무수석 발탁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의원 보좌관은 “정 수석은 친이라기보다는 친박에 가까운 인물이다. 의원들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 대통령이 우리와 잘 해보겠다는 것 아니겠느냐. 박 전 대표에게도 그러한 생각을 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정 수석과 함께 임태희 비서실장 역시 비교적 친박과 말이 잘 통하는 친이계로 꼽히고 있어 이 대통령의 ‘화합형’ 인사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지난 7월 29일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박 전 대표와 극심한 마찰을 빚었던 정운찬 총리의 사표를 수리한 것도 친박과의 ‘화해’를 염두에 뒀을 것이란 관측이다.
이처럼 이 대통령이 인사를 통해 ‘손길’을 내밀었지만 친박은 쉽사리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동안 번번이 뒤통수를 맞았다고 판단했기 때문. 더군다나 ‘왕의 남자’로 불리는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7·28 재보선에서 승리하며 당으로 귀환하자 친박 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친이계 최대주주인 이 의원이 돌아올 경우 ‘친박-친이’ 갈등이 더욱 확산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기 때문. 앞서의 친박 의원 보좌관은 “이 의원이 누구냐. 2008년 총선에서 공천 학살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2012년 총선에서 그러한 일이 또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러자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지난 7월 29일 이 대통령은 이 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베풀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실세다운 행보”라는 반응이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조금 다르다는 게 여권 핵심 인사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당선 축하와 함께 집권 후반기 당을 잘 이끌어달라고 주문했다. 특히 친박과의 원활한 관계를 당부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오랜만에 여권에 ‘화해 모드’가 조성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계파끼리 충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일종의 ‘경고’였던 셈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마침내 친박 측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한 번 믿어보자’는 목소리가 조금씩 확산됐다. 여기엔 정진석 정무수석과 임태희 비서실장의 노력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여러 친박 인사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뜻을 여권 핵심부로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박 전 대표 측근으로 꼽히는 한 의원은 “정권 출범 후 우리를 국정 파트너로 인정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 수석과 임 실장은 진정성을 가지고 대했다. 많은 친박 의원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특히 정 수석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회동에서 결실을 내기 위해 친박 인사인 유정복·이정현 의원을 만나 회담시기와 안건 등에 대한 조율에 신경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표도 예전과는 다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이 대통령과의 회동에 대해 “만남을 거절한 적이 없다”며 소극적 입장을 보였던 박 전 대표는 최근 지인들에게 “국민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꼭 성과를 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무산 가능성이 나올 정도로 ‘무용론’이 파다하던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회동이 이제는 새로운 ‘데탕트(긴장완화)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거론되고 있다. 앞서의 박 전 대표 측근 의원은 “지금 여러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박 전 대표도 뭔가 이 대통령에 줘야 하지 않겠느냐. 대북특사를 포함해 국정에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은 할 수도 있다. 세종시 정국이 끝난 이후 여권 내에서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박 전 대표 역시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 이명박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박 전 대표와 극심한 마찰을 빚었던 정운찬 총리의 사표를 수리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서울 은평을 재보선에서 당선돼 정계에 복귀한 이재오 의원.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7월 14일 전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꾸려진 당 지도부가 친이 일색이라는 점도 박 전 대표로서는 고민이 됐을 법하다. 안상수 당 대표를 비롯해 최고위원 다섯 명 중 친박은 단 한 명(서병수 의원)뿐이다. 비주류 수장으로서 대권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 전 대표이기에 친이 주류를 이끌고 있는 이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좋든 싫든 ‘살아있는 권력’인 이 대통령의 협력을 얻어낼 경우 대권 도전은 보다 수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권 핵심 인사들 사이에선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회동에서 정권 재창출과 관련된 모종의 합의를 이뤄낼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MB 대선 캠프 출신의 한 여권 관료는 “이 대통령은 임기 내에 뭔가 성과를 내고 싶어하는데 세종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 전 대표 도움이 절실하다. 박 전 대표로서는 ‘차기’가 최우선 관심사인데 이 대통령이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친박 측의 이러한 변화 움직임의 또 다른 배경을 친이 내부 파워게임에서 찾기도 한다. 이재오 의원의 ‘컴백’으로 한나라당은 새로운 ‘판짜기’가 불가피한 상황. 특히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여권 주류의 3대 계파로 불리는 ‘소장파-이재오계-이상득 라인’의 주도권 싸움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로서는 그다지 손해 볼 게 없는 ‘그들만의 싸움’이다. 몇몇 친박 인사들은 ‘구경한 뒤에 떨어진 떡고물만 챙기면 된다’며 여유 있는 모습이다. 경남지역의 한 친박 재선 의원은 “괜히 갈등을 일으킬 경우 친이가 단결할 수 있다. 우리는 적당히 선을 유지하면서 친이의 자중지란을 기다리는 게 더 낫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