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
사실 지난 5월 그가 원내대표에 당선된 뒤부터 당 권력의 상당부분이 그에게 쏠리는 듯했다. 지난 3일 정세균 전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7·28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뒤에는 당의 전권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됐다. 오는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새 지도부 출범하기까지 그가 당의 ‘얼굴’이자, 대표·최고위원 경선의 ‘감독관’인 것이다. 전당대회준비위원회가 논의 중인 당 지도체제 변경, 경선 룰 등 민주당의 미래를 결정할 중대 사안의 향배에 그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는 인사는 이제 아무도 없다. 변화무쌍한 정치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현재 민주당의 ‘1인자’다.
그는 한때 ‘권불십년’(權不十年)의 대명사로 취급당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그는 한때 ‘소(小)통령’으로 불렸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밀사를 맡았던 게 짐으로 돌아와 대북송금 문제로 오랜 재판과 투옥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이후 목포에서 정치적 재기를 노렸지만, 민주당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당시 그는 “친정에 돌아가지 못하는 아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할 정도로 ‘막장’ 신세였다.
그러나 그는 2008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고, “민주당의 수위라도 하겠다”며 복당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뒤 동교동계를 비롯한 동료 의원들의 신망을 회복하기 시작한 그는 2009년 원내대표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어 당 정책위의장을 맡아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뛰어난 정보력으로 천 후보자를 낙마시키며 존재감을 과시하더니, 올해 원내대표 선거에서는 당당히 1위로 당선됐다. ‘DJ의 입’으로 제1의 전성기를 보냈다면, 이제는 ‘호남의 정치거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무서울 정도의 쾌속 질주에 그의 주변에선 “당권만이 아니라 대권까지 꿈꾸고 있는 게 아니냐”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라는 말로 입을 막았다고 한다. 더 나아가기에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에서 덕지덕지 붙어버린 ‘흠’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가 지닌 탁월한 지략가로서의 면모를 숨기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당내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목표에 집중하는 타고난 근성, 동료 의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친화력을 바탕에 둔 조직장악력, 뛰어난 상황판단과 직관에 기반한 정치마케팅 마인드, 여기에 최고 권력을 가장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국정경험까지 그가 ‘킹메이커’로서의 최적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 원내대표가 누구를 무등 태우느냐에 따라 민주당의 당권과 대선후보가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가 점점 무게 있게 퍼지고 있다.
박 원내대표의 그런 의중을 떠볼 수 있는 시험대가 바로 대권주자들의 전초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9월 전당대회의 당권경쟁이다. 그는 현행 ‘단일성 지도체제’를 ‘순수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비대위원장을 맡은 이후에는 “나는 입이 없고, 귀만 열어놓았다”고 되뇌고 있다. 그만큼 공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독주’를 바라보는 일각의 경계심에 대해서도 “비대위는 지도부를 대신할 뿐이지 당권을 잡은 권력기관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어 놓았다. 독주냐 해결사냐, 양극단의 우려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황을 의식한 신중한 행보다.
▲ 손학규 고문. |
‘손학규 대안론’은 아직 일각의 시각이기는 하지만 당내에선 꽤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는 시나리오다. 전제는 한나라당의 상대 경쟁후보가 박근혜 전 대표일 경우다. 영남과 충청지역 기반의 박 전 대표, 호남과 수도권에 기반한 손 고문이 이념적으로 중도층을 놓고 쟁패를 벌인다면 가장 치열한 접전상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다. 이에 대한 박 원내대표의 생각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세균 전 대표나 정동영 고문을 전제로 한 대선구도보다는, 박 원내대표도 솔깃할 정도로 훨씬 매력적인 시나리오인 게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박 원내대표의 오랜 측근인 박양수 전 의원이 손학규 캠프에 합류한 것이다. 박 전 의원은 동교동계 인사로 민주당의 조직특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조직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야당 시절부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선거가 없을 정도다. 손 고문 측에서는 최대 취약점인 조직력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사로 기대를 받고 있다. 그의 합류에 박 원내대표의 의중이 실렸다고 볼 만한 정황은 아직 없다. 박 원내대표도 “그 사람이 스스로 판단해서 간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물론 이 같은 연대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당권경쟁의 ‘감독자’인 박 원내대표가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놓을 리는 만무하다. 다만 손 고문이 지난 2년간의 춘천 칩거 생활을 정리하고 당권 행보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후가 문제다. 전대 룰 확정을 둘러싼 갈등이나 조직력 경쟁이 첨예해질 경우 상대 진영의 정략에 따라 ‘박-손 연대설’이 경선 이슈로 부각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손 고문 진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생 정치적 동지였던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좌장으로 여의도에 캠프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원내에서는 김부겸 신학용 전혜숙 최영희 서종표 이찬열 이춘석 의원 등 10여 명이 손 고문과 가까운 인사로 분류된다.
여론조사기관들에 따르면 손 고문은 전당대회 국면에 들어와 대의원을 대상으로 한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정 고문과 정 전 대표, 박주선 의원 등 후위그룹에 5~15%포인트 차이로 지지율에서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 원내대표의 행보가 주목받는 가운데 ‘손학규 대안론’이 얼마나 확산되느냐가 당권경쟁의 최대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