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형적인 정독파로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메모하거나 깊이 음미하며 읽는 스타일이다. |
한여름 휴가철의 가장 좋은 피서법 중 하나는 독서일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에게 독서는 휴가철에 즐길 수 있는 사치(?) 중 하나라고 한다. 대다수 정치인들이 평소에도 틈틈이 책을 접하지만 맘 편히 독서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등 정치인들도 이번 여름더위를 책과 함께 보내고 있다며 자신이 읽었거나 읽고 싶은 책을 트위터 등을 통해 추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과 앞으로 대통령을 꿈꾸는 차기 대권주자들은 과연 어떤 책과 독서법을 애용하고 있을까. 정치인들이 독서를 통해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독서법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최근 <대통령의 독서법>(지식의 숲)을 낸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독서법은 그 사람의 성격과 일맥상통하며 독서 스타일을 보면 그 정치인의 리더십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최진 소장의 분석을 통해 정치인들의 독서 유형을 들여다보았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정의란 무언인가>(김영사)란 책이 일대 화제가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휴가기간 ‘e북’을 가져갔는데 이 책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보도되었다가 ‘오보’였음이 밝혀진 것. 이 책이 아직 e북 콘텐츠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네티즌들 사이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청와대가 뒤늦게 해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휴가 중 독서 목록이 논란이 되자 청와대는 “이번 휴가 때는 이 대통령의 도서 목록을 굳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e북의 콘텐츠 목록도 별도로 공개하지 않음을 알려드린다”는 해명으로 이를 수습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세계적인 석학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실제 자신의 강의 ‘JUSTICE’(정의)를 바탕으로 쓴 책으로 앞서 박근혜 전 대표가 “흥미롭게 읽었다”고 언급해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서점가에서도 일찌감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화제의 책이었는데 이번에 정치권에서 이 책이 언급되면서 판매량이 더 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정치인들의 독서 목록은 대중들에게 큰 관심을 받곤 한다. 방대한 책 중에서 정치인들이 ‘고른’ 책이라는 데에서 책에 대한 신뢰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성공한 이들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는지는 대중들에게 중요한 정보로 느껴진다. 그래서 때로 정치인들은 책을 자신의 정치 철학을 전하는 메시지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정치인들의 독서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민심의 향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수단”이라고 말한다. ‘독서정치’, 즉 정치인들에게는 독서도 하나의 정치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력 정치인들은 과연 어떤 독서방법을 활용하고 있을까. 최진 소장은 “독서방법은 정치인의 성격과 리더십 스타일과 맞아 떨어진다”면서 “차기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이라면 각자의 독서스타일의 단점을 보안하는 책읽기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먼저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 전형적인 ‘정독파’ 유형이라고 한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을 가진 박 전 대표는 책을 읽을 때도 이러한 성향이 반영된다고 한다. 최진 소장은 “박 전 대표와 같은 내향적 성격의 소유자는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깊이 음미하며 읽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대표의 이러한 독서법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서법과 꼭 닮아 있다. 치밀하고 내향적인 성격으로 전형적인 좌뇌형 인간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책을 읽을 때도 아무 책이나 막 읽지 않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책만 골라 읽는 정독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나폴레옹 전기>와 같이 마음에 드는 책은 완전히 자기 것이 될 때까지 숙독을 했다.
박 전 대표와 같은 ‘정독파’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최진 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종종 식사 시간도 잊을 채 밑줄을 좍좍 그어가며, 또 메모해가며 서서히 책장을 넘겼다”며 “가택연금 시절에도 책을 읽을 때는 가급적 반듯한 자세를 취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안방→응접실→서재→안방으로 이어지는 단순 일과를 되풀이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한 공부를 잘했음에도 가난 때문에 대학에 갈 기회를 놓치면서 갖게 된 ‘학력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독서력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독파는 다양한 분야의 책읽기를 소홀히 할 수 있는 단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최진 소장은 “국가 지도자라면 정독과 다독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독을 통해 다양한 분야와 계층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7·28 재보선을 통해 여의도에 복귀한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의 경우엔 다독을 즐기는 성격 유형을 갖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의 공천 파동 이후 미국 생활을 했을 당시 상당히 많은 책을 섭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의원은 존스홉킨스 대학 초빙교수로 강의를 해서 받은 월급 200만 원과 간간이 특강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는 돈으로 미국 생활비를 해결했는데, 돈을 넉넉히 쓸 수 없었던 터라 강의가 끝나면 학교에 남아 책을 읽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이재오 의원 ‘독서실력’의 뿌리는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간다. 그는 영양고등학교 재학 시절 교내 독서클럽을 맡아 활약했는데 이후 대학입시 공부를 하면서 ‘다독’ 실력이 발휘되기도 했다. 3개월 동안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해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에 4년 장학생 대우로 입학했던 것.
한때 친박계와 갈등을 겪기도 한 이재오 의원은 다소 강인하고 경직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최진 소장은 “이재오 의원은 재야 운동권 출신이기도 해서 역사와 이데올로기 서적을 많이 읽은 것으로 보인다. 국가 지도자로서 역사의식을 굳건하게 갖는 것은 좋으나 여러 분야를 다독하는 것이 좋다. 포용력 있는 사고를 기르기 위해서는 철학서적을 많이 읽으며 관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의 경우 기업가 출신답게 실용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한다. 이 점은 이명박 대통령의 독서 스타일과도 비슷하다. 이 대통령 역시 기업가 시절부터 경제 관련 실용서적을 섭렵해와 짧은 시간에 읽는 ‘속독능력’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진 소장은 “이 대통령은 어린 시절부터 (고학을 했던 터라) 속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왔다.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후에도 국내외 건설 현장에 뛰어다니느라 일부러 시간을 내어 빠른 속도로 읽지 않으면 도무지 책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같은 속독법은 촌각을 다투는 바쁜 사람들에게는 유용하지만 책의 깊은 묘미를 음미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몽준 전 대표는 다독파이면서도 정독파라는 점에서 이 대통령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책에다가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해가며 읽는 방법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독법과 비슷한 점이기도 하다.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정 전 대표는 평소 대화에서도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즐겨 인용하곤 한다. 특히 <로마인 이야기>(한길사)는 정 전 대표가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손꼽는 책 중 하나인데, 1999년 대한축구협회장 시절 정 전 대표는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를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었다. 당시 정 전 대표는 시오노 나나미와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해 대담을 나누었다. 그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 중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다.
정 전 대표가 “우리나라는 IMF로 고생하고 있는데 이는 국민이 아닌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힘으로 이것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이를 보면 ‘지도자론’이라는 것이 허망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든다”고 털어놓자, 시오노 나나미는 “아주 이상적인 지도자는 국민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면서 사실상 자신이 이끌어 나가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한 “리더의 역할은 이러한 고생을 스스로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뿐 아니라 국가 리더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귀담아 들어볼 만한 대목인 셈이다.
정치리더들 중 특히 야권의 대선주자들에게 ‘독서력’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최진 소장의 의견이다. 최 소장은 “야당의 지도자라면 국민들에게 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흡인력이 필요하다. 더 많은 책을 읽어 민심을 꿰뚫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7·28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의 경우 다섯 권이나 책을 낸 저술가이기도 하다. 책을 쓰기 위해 여러 분야의 책을 다독하는 것이 정 전 대표의 독서 스타일. 그가 쓴 책들은 <정세균이 바라보는 21세기 한국의 리더십>(나남), <21세기 한국의 비전과 전략>(나남), <정치에너지>(후마니타스) 등 국가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내용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 전 대표는 정작 민주당 대표 시절 ‘강한 야당 지도자’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을 곧잘 지적받곤 했다.
작년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정 전 대표는 “한 손엔 쟁기를 한 손엔 책을 들고 싶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일과 공부는 동시에 하기 힘든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의미였다. 정 전 대표가 당 대표직을 맡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통과와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 등 잇달아 사건이 터지면서 느꼈던 고충을 토로하는 말이기도 했다. 실제 정 전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손엔 쟁기, 한 손엔 한나라당의 폭압 앞에 짱돌이라도 들어야 했던 세월이었다”고 털어놓았다는 후문.
▲ 손학규 전 대표가 2006년 민심대장정 기간 읽을 책을 고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또 다른 야권 주자인 정동영 민주당 의원도 평소 책을 많이 읽는 스타일이다. 주변에 따르면 수필집 같은 정서적인 책도 즐겨 읽지만 현대사회의 문제점이나 개혁을 화두로 다룬 책을 자주 읽는 편이라고 한다. 지난 2008년 대선 때 그가 인상 깊게 읽었던 책 중 하나는 선진국 성장 과정 뒤에 가려진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최근 정 의원은 트위터에서 나눈 대화와 독서평 등을 모아 <트위터는 막걸리다>(리북)란 책을 내기도 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국민참여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섰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저술가이자 다독파 정치인.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푸른나무) <후불제 민주주의>(돌베개)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썼고, 지난해 10월에는 자신의 삶의 행로를 바꾸고 이정표가 됐던 14권의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 <청춘의 독서>(웅진지식하우스)를 내기도 했다. 평소 깊고 넓게 책을 읽는 편인 유 전 장관은 이 책 속에서 ‘세상이 두려울 때마다 책속의 저자들에게 길을 물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력 정치인들은 대체로 어떤 책을 즐겨 읽을까. 많은 정치인들이 추천하거나 감명 깊게 읽었다고 평하는 책의 상당수는 바로 역사서다. <백범일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열국지> <로마인 이야기> <장길산> 등 정치인들의 애장 독서목록에는 역사서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생활을 하던 중 12권으로 된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영어원전으로 수십 차례 읽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책을 읽은 뒤 “나는 인류역사의 대파노라마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소감문을 쓰기도 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성공한 대통령들은 공통적으로 역사서적과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이런 종류의 책을 통해 역사관을 갖게 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구상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 역사서가 미치는 영향을 대단하다”고 설명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