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장쩌민 주석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중국이 한국(1986년)에 이어 아시안게임을 치렀을 때다. 당시만 해도 아직 중국은 덜 개방되어 공산국가의 폐쇄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장쩌민은 그때만 해도 중국 공산당 당서기로 줄곧 양상쿤(楊尙昆) 주석의 뒤에 앉아 있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베이징아시안게임에는 북한 선수단이 참석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완연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중국은 1990년 도쿄에서 있었던 IOC 총회 바로 다음날 전세기를 동원해 전 IOC 위원을 베이징아시안게임으로 초청, 올림픽 전초전을 벌인 바 있다. 그때만 해도 베이징은 비행장과 운동장 등 사회 인프라가 덜 갖춰져 있었다. 자전거는 7억 대지만 베이징 내 자동차가 5000대밖에 없어 한국이 250대를 기증하던 시절이었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VIP 영접 등 손님맞이 문화도 서툴렀다. 비행장에 도착한 IOC 위원들을 큰 방에 몰아넣고 입국수속에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다. 여권도 나중에 방에 따로 가져다주고 심지어 호텔에서 국제전화도 걸 수 없었다. 당시 귀빈호텔에 묵었는데 호텔 내에서조차 영어가 안 통해 다른 IOC 위원 방으로 전화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아시아게임을 보러 나가려고 해도 차량동원이 안 되었다. 따라서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특히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IOC위원들의 불평이 대단했다.
장쩌민을 두 번째로 만나 한 시간 가량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것은 1993년 그가 주석이 된 후 열린 제1회 동아시안게임 기간 중이었다. 동아시안게임은 중국이 올림픽게임 유치를 위한 실적 쌓기로 창설을 주도한 대회였다. 나는 장쩌민의 숙소에 가서 1시간가량 면담을 가졌다. 장 주석은 이 대회를 위해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직접 내려와 있었다. 장 주석과 함께 베이징에서는 우방궈(吳邦國) 문화담당 정치국원도 왔고, 상하이의 간판인 황쥐(黄菊) 상하이 당서기도 왔다. 이른바 상하이방(상하이파)이 장쩌민 주석을 따라 득세하기 시작할 때였다. 우방궈는 현재도 전인대 의장을 맡고 있다. 장 주석은 촌할아버지처럼 보여도 그 나름대로 위엄이 있었고 차분하면서 겸손했고, 그러면서도 위엄 있게 중국의 실정, 베이징올림픽 개최에 대한 명분과 노력, 한중관계의 장래 등을 논했다. 특히 필자에게는 베이징올림픽 유치에 대한 지원 요청을 특별히 부탁했고 나중에 지원요청 공한(공식서한)도 보내왔다.
동아시안게임 창설이 베이징올림픽 유치를 위한 스포츠분야 실적 쌓기였던 만큼 대회장은 각국 NOC 위원장이 맡고 시설도 기존시설을 쓰면서 ‘10개 종목에 10개 참가국’으로 세팅됐다. 심지어 별도의 사무국도 안 두기로 했다. 그래도 어쨌든 국제종합경기대회였다. 제1회 대회의 조직위원장은 중국 NOC 위원장인 허진량(何振梁)이었고, 1997년 2회 부산대회는 KOC 위원장인 필자가 맡았다.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총재 그리고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이 참석한 부산대회의 개회식에서는 ‘작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만의 교육부 장관에게 부산에서 ‘G카드’(귀빈용)를 발급했는데 새벽 3시에 중국이 우샤오주(吳紹祖) 체육장관 명의로 대만 장관에 대한 ‘G카드’를 취소해 달라는 항의문을 보내왔다. 대회 보이콧도 불사한다는 강경입장이었다. 다행히 ‘G카드’를 ‘O카드’(참관자)로 대체하는 것은 중국이 필자의 얼굴을 보아서 받아들인다고 했다. 대만 장관에게는 ‘O카드’로 대체는 하지만 차량과 좌석, 호텔 등은 귀빈 대우를 한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불참했다. 그리고는 개회식의 선수입장 때 대만 선수단이 1분간 정지하는 무언의 시위를 펼쳤다. 중국은 대만 정부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고, 대만은 또 카오슝이 부산에 2002아시안게임을 빼앗긴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이 사건도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동아시아대회는 전 대회 조직위원장이 그 다음 대회의 명예위원장을 맡는 까닭에 2001년 제3회 오사카 동아시아대회 때는 후루하시 JOC 위원장이 조직위원장을, 필자가 명예위원장을 각각 맡았다. 부산이 제2회 동아시안게임을 유치한 것은 중국에 대한 협조, 그리고 스포츠대회 개최 경험이 없는 부산의 아시안게임(2002년) 예행연습을 위해서였다.
상하이동아시안게임 때까지 중국은 국제경기를 치른 실적이 많지 않았다. 특히 장쩌민 주석이 상하이 출신이라 상하이방의 우방궈, 왕쥐 등이 중용됐다. 개인적으로는 상하이에 있는 동안 필자의 서울올림픽에 대한 저서 <위대한 올림픽>이 중국어로 발간되었다. 올림픽출판사에 의해 <위대한 올림픽>이라는 제목으로 5명이 번역했고 왕쥐, 허진량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인회와 기자회견도 가졌다.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위대한 올림픽>은 일본에서도 다케다 IOC 위원, 사마란치 위원장, 고바야시 요미우리 사장, 시마 NHK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90년에 출판된 바 있다.
▲ 1995년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개회식. 앞줄 가운데 장쩌민 주석, 필자 등이 보인다. |
모나코 IOC 총회에서 리난칭(李嵐淸) 부총리, 천시통 베이징시장, 우샤오주 체육장관, 허진량 중국NOC 위원장이 인솔한 베이징올림픽유치단 200명이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슬로건은 ‘더 개방된 중국이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노력만큼이나 투표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 승리를 확신했지만, 미국 등 서구의 인권문제 공격(인권문제에 대해 미 의회와 영국외무성의 성명 발표가 있었다), 영연방의 단결된 투표로 인해 베이징은 최종결선에서 시드니에 2표 차이로 역전패했다.
최종 투표 직전에 아프리카 회장인 강가(Ganga)가 필자에게 “이제 우리(베이징 지지파)는 졌다”라고 했는데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필자는 이때 장쩌민 주석의 얼굴이 눈에 떠올랐다. 그리고 모나코 거리를 메운 중국 유치단도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승리를 확신했는지 중국은 발표 후에 전 IOC 위원을 베이징으로 초대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TV앞에 모였던 베이징 시민들이 패배를 믿지 않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고까지 했다고 한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지만 다시 8년을 더욱 치밀하게 준비해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따냈다. 대국답게 처신한 것이다.
모나코 IOC 총회 투표 전날 승리를 확신한 중국은 사마란치에게 개최지 선정발표 직후 전 IOC 위원을 특별기로 중국에 초청하겠다고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아는 사마란치가 놀라서 못하게 했다. 그 후 개인적으로 동수가 나오면 사마란치가 결선표(Casting vote)를 어디다 던질 것이냐 물어봤는데 사마란치는 “표를 안 던지고 결정될 때까지 표결에 계속 붙일 것”이라고 했다. 사마란치도 입장이 곤란했던 것이다. 당시 사마란치는 중국에 초대받아 가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10가지 요리가 나왔다고 한다. 사마란치가 좀 줄이라고 주문을 했더니 다음에는 딱 한 가지만 줄어든 9가지씩 나왔다는 일화도 있다. 사마란치한테서 직접 들은 얘기다.
장쩌민 주석을 다시 만난 것은 1996년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때였다. 나는 장 주석과 나란히 앉아 구정(舊情)을 새롭게 하고, 많은 이야기를 통역 없이 영어로 나눴다. 필자가 한자에 밝은 것을 알았는지 장 주석은 어떤 것은 한자로 직접 써서 보이기도 했다. 김구 선생이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필담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했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바 있는데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필자는 IOC 수석부위원장으로 IOC를 대표했다. 장 주석은 한국인이 IOC 정상에 올라있는 것을 흐뭇하게 생각해 특별지시를 내려 공항에 레드카펫을 깔아놓고 영접도열까지 준비하는 등 국빈대우를 해줬다. 장 주석은 필자가 용평으로 하여금 1996년 동계아시안게임을 하얼빈에 양보하도록 배려한 것에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 스포츠외교는 상대를 때려눕히는 것만이 아니고 양보해 줄 때도 있어야 한다.
2009년 2월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한 하얼빈은 이제 동계올림픽유치를 준비하고 있다. 1996년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때는 스키경기가 200㎞나 떨어진 야부리(亞布利)에서 열렸는데 그곳은 춥기도 추웠지만 가는 도중에는 지나가는 차량이 하나 없을 정도로 황량했다. 눈을 군인들이 가마니로 갖다 깔고 있기에 “눈 만드는 기계가 없느냐”고 했더니 관계자가 “있기는 있는데 나르는 것이 낫다”고 설명했다.
지난번 광주유니버시아드 유치 관계로 하얼빈에 다시 찾아 간 적이 있는데 그때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굉장한 스포츠 시설들이 건립돼 있어 깜짝 놀랐다. 장 주석이 이끄는 중국은 1993년 하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후 한 번을 거르고 8년 후 모스크바에서 토론토, 파리 등을 꺾고 마침내 유치에 성공했다. 이후 7년간의 준비와 450억 달러를 투입한 베이징올림픽은 204개국이 참가한 사상 최대, 최고의 올림픽이었고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스포츠 최강국으로 등극했다. 중국은 일하는 스타일이다.
2001년 모스크바 총회 전에 장쩌민 주석은 조용히 준비하면서 필자에게 적극적인 지지요청공문을 한자 및 영자로 보내왔다. 그리고 장 주석은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와서 다짐을 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돌아갔다.
중국이 정치 외교 군사 경제에 앞서 스포츠분야에서 먼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데에는 ‘작은 거인’ 장쩌민 주석의 활약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후임들이 이 최고의 자리를 어떻게 지켜나갈지 궁금하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