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 청담동의 고급빌라촌. |
지난 1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청담초등학교 인근 450여 채의 고급 빌라가 모여 있는 청담빌라촌. 인근 중개업소엔 시세보다 20~30% 싼 고급빌라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 중개업소에 들어서니 실장 직함의 중개업자가 “이곳엔 급매물은 따로 없다”고 했다. 다만 “원하는 가격을 말하면 작업을 해준다”고 덧붙였다. ‘작업’은 매수자가 나타나면 매도 희망자에게 연락해 협상을 주선해 준다는 이야기다. 기자가 “최근 몇 개월 사이 5억~6억 원씩 떨어진 곳이 있다고 듣고 왔다”고 하자 그는 이내 작업 대상 매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급 빌라의 가격 하락폭은 생각보다 컸다. 불과 6개월 전 46억 원에 거래됐던 Y 빌라 409㎡형은 39억 원에, 올 초 입주한 인근 B 빌라 247㎡형은 분양가보다 5억 원 낮은 43억 원에 사줄 수 있다고 했다. 2년 전 준공된, 분양가 30억 원이 넘는 A 빌라 406㎡형은 경매에 넘어간 매물이 생기는 바람에 21억 원까지 떨어졌다. 인근 다른 중개업소 관계자는 “이곳 빌라촌에서 급매물이 나오는 건 요즘 처음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했다.
과거 분양만 받으면 입주 때 무조건 수억 원씩 시세차익을 누렸던 이곳이지만 지금은 미분양도 흔하다. 지난 7월 준공한 M 빌라는 절반이 미분양으로 남았다. 2년 전 분양을 시작한 S 빌라도 미분양이 남아 있다는 게 중개업자들의 설명이었다. 한 중개업자는 “M 빌라 저층 396㎡형은 분양가가 36억 원이었지만 20억 원대 초반에도 살 수 있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현상은 청담동 빌라촌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9월 준공한 강남구 도곡동 R 주택 337㎡형은 분양가 40억 원 수준이지만 30억 원이면 살 수 있다는 게 인근 중개업자의 설명이다. 서초구 방배동 H 주택 239㎡형은 14억 원에 분양했지만 지금은 10억 원 미만에 내놔도 거래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급주택 전문업체인 럭셔리앤하우스 유성철 대표는 “최근 서초구 서초 잠원 방배동, 강남구 논현 도곡동 등에는 분양가나 감정가 대비 20% 이상 싼 고급빌라 급매물이 흔하다”고 말했다.
고급주택 가운데 집값이 많이 떨어진 곳은 역시 대지지분이 낮은 주상복합이다. 부동산 경기침체가 심화되면서 주상복합 아파트의 낮은 대지지분이 새삼 더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신한은행 이남수 부동산팀장은 “자산가들일수록 최근엔 미래 가치를 따지면서 대지지분이 높은 주택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대지지분이 낮은 주상복합 집값이 최근 가장 많이 추락하고 있다”고 전했다.
강남 고급주택의 상징인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대표적이다. 이 주상복합 아파트는 전용면적 대비 대지지분 비율이 20%도 안 된다. 이 아파트 전용면적 175㎡형의 대지지분은 26㎡에 불과하다. 30억 원이나 되는 집이지만 대지면적은 웬만한 중소형 아파트 수준도 못 되는 셈이다. 대지면적이 작으면 투자가치는 떨어진다. 부동산 개발 전문업체 미래시야 강은현 이사는 “이런 주상복합 아파트가 노후화되면 지금보다 더 높이 재건축을 해 개발이익을 얻을 가능성은 없다”면서 “건축물 가치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대지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급매물이 증가한다. 타워팰리스 3차 164㎡형은 지난해 5월 30억 원에 거래됐지만 최근 25%나 떨어진 22억 2000만 원에 실거래 신고됐다(로열층 기준). 또 다른 강남권 대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도곡렉슬도 마찬가지다. 도곡렉슬 135㎡형의 경우도 지난해 중순 23억 원에 거래됐으나 최근 18% 빠진 19억 원에 팔렸다. 인근 E 공인 관계자는 “20억 원이 넘으면 시세보다 5억 원, 20억 원 미만이면 3억~4억 원씩 내린 급매물이 흔하다”며 “매수자가 요구할 경우 2억~3억 원 더 내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고급주택이 위기를 겪고 있는 이유 역시 일반 매매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침체로 투자수요가 사라졌고 거래가 너무 안 되기 때문이다. 고급빌라만 전문적으로 중개하는 삼성동 금잔디공인 최정일 실장은 “최근 이 일대 통틀어 한 달에 한 건 거래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만 해도 1억~2억 원만 내려도 금방 팔렸는데 지금은 부동산에 투자하려는 사람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하소연했다.
청담동 J 공인 관계자는 “올 들어 지금까지 단 한 건의 매매계약도 하지 못했다”며 “급매물이 나와도 더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답답해했다. 거래가 없으니 간혹 급매물이 나오면 시세로 굳는다. 경매시장에 간혹 한두 건이 등장하면 낙찰가격을 기준으로 집값을 따지는 경우도 나타난다. 대치동 T 공인 관계자는 “경매 낙찰가를 기준으로 매수 희망가를 요구해 거래가 성사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서울 고급주택의 거래 부진은 수도권 타운하우스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타운하우스와 주요 수요층이 겹치기 때문이다. 타워팰리스 176㎡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김 아무개 씨는 당초 동백지구 한 타운하우스 257㎡형을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집을 내놓은 지 1년이 넘었지만 기존 주상복합 아파트가 나가질 않아 포기했다. 국민은행 시세 기준에 맞춰 26억 원에 내놨지만 중개업소에서는 20%는 더 깎아야 매매가 된다고 요구했다. 김 씨는 “급매물로 팔면서까지 이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타운하우스로 이사할 계획은 당분간 접었다”고 말했다.
고급 타운하우스인 아펠바움 분양을 맡고 있는 SKD&D 고명덕 부장은 “경기도 죽전 동백 동탄 등지의 타운하우스는 대부분 서울의 고가 주상복합 거주자들이 주요 수요층”이라면서 “기존 주상복합 거래가 안 되면서 수요층이 매수를 미루는 바람에 미분양분이 잘 안 팔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씨티은행 김일수 부동산팀장은 “고급주택도 절반가량은 경기 침체에 큰 영향을 받는 투자수요”라면서 “주택에 대한 투자심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고급주택 시장 침체의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박일한 중앙일보 조인스랜드 기자 jumpcu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