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선라인 보고’ 등으로 논란을 빚었던 박영준 전 총리실 국무차장이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내정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8월 13일 단행된 차관급 인사에서 박 전 차장의 이러한 ‘위상’은 증명됐다. 비선보고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박 전 차장을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내정하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였다. 박영준 2차관은 자원외교와 함께 국무차장 시절 맡았던 TF 단장도 일부 유지할 예정이어서 ‘왕차관’으로서의 면모는 줄어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박 차관의 ‘전면 사퇴’를 외쳤던 여권 소장파는 당혹해하는 한편, 공세의 강도를 높일 채비를 하고 있다. 박 차관의 자리 이동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여권 권력투쟁, 그 이면을 들여다봤다.
얼마 전 총리직에서 물러난 정운찬 전 총리가 이임식(8월 12일) 직전까지도 ‘아쉬움’과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을 받고 있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을 폐지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측근들에게 토로했던 것이다. 총리실의 한 고위 간부는 “정 (전) 총리는 이인규 전 지원관과 같은 사례가 또 일어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아예 없애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 총리가 물러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로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이어 그는 “총리실 내에선 박영준 (전) 차장이 공직윤리지원관실 폐지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총리와 박 차장과의 보이지 않는 ‘대결’에서 박 차장이 이긴 것이다. 이 때문에 ‘박 차장이 실세는 실세구나’라는 말이 돌았다”고 덧붙였다.
얼마 전 사조직 및 비선보고 논란이 들끓으면서 한때 정치권에선 국무차장을 맡고 있던 박 차관이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그의 측근들이 대거 물러날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게 제기됐었다. 영포회 및 선진국민연대의 인사개입과 총리실 사찰 의혹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그 중심에 서 있던 박 차관의 ‘책임론’이 확산됐던 것이다. 한나라당 소장파를 이끄는 정두언 의원과 민주당은 박 차관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차관의 ‘위상’엔 흔들림이 없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박 차관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끝까지 함께 가자”며 무한한 신뢰를 나타냈다(<일요신문> 949호 참고). 이 대통령은 청와대 일부 참모가 ‘박영준 퇴진’을 거론했지만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도 알려진다. 여러 구설이 있다는 것을 이 대통령도 잘 알고 있지만 대선 때 이미 검증된 그의 로열티와 업무능력을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지난 7월 말 이뤄진 청와대 인사에서도 박 차관의 ‘힘’은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해 8월 새롭게 신설된 이후 일 년여 동안 공석이던 공직기강비서관 자리에 박 차관의 ‘서울시 인맥’으로 분류되는 장석명 공직기강팀장이 승진, 배치된 것이다. 경북 예천 출신인 장 비서관은 서울시 근무 시절 당시 정무국장이던 박 차관과 인연을 맺었고, 인수위를 거쳐 청와대에 입성한 케이스다. 장 비서관을 두고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공직기강비서관에 임명될 것이란 말이 나왔으나 ‘TK·S라인 인사’라는 일부 반대 때문에 무산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장 비서관이 비선 보고로 물의를 일으켜 물러난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다. 더군다나 공직기강비서관은 주요 공직대상자를 검증하고 일부 사정 기능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자리인 만큼 박 차관은 더욱 든든한 ‘우군’을 얻은 셈이다. 장 비서관 후임엔 역시 서울시 출신으로 박 차관과 친분이 있는 조상명 총무기획관실 인사팀장이 발탁됐다.
‘범SD 라인’이자 인수위 시절부터 박 차관과 가깝게 지냈던 이상휘 춘추관장도 언론정책을 총괄하는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자리이동을 했다. 또한 진퇴를 놓고 찬반여론이 팽팽하던 김명식 인사비서관도 유임으로 결론이 났다.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김 비서관은 중앙인사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박 차관 추천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것으로 알려져 대표적인 박 차관의 ‘TK 인맥’으로 꼽힌다. 이밖에 박 차관과 함께 정부와 공공기관 인사 실무를 맡았던 인사비서관실의 윤한홍·이동헌 선임행정관도 한때 사직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각각 대통령실장실과 지식경제비서관실로 자리를 바꿨을 뿐 오히려 권한은 더 강화됐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새롭게 인사비서관실로 들어온 김회구 선임행정관 역시 박 차관과는 의사소통이 원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이 사표를 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청와대 내 박 차장 라인은 질적·양적으로 모두 ‘업그레이드’됐다”고 말했다.
이번 차관급 인사에서 당초 박 차관은 제외되는 안이 유력했었다는 게 여권 관계자의 전언. 이 대통령의 신임이 여전히 두터웠고, 박 차관 역시 총리실 잔류를 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대통령은 이인규 전 지원관과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이 물러난 상황에서 박 차관까지 그만둘 필요가 있느냐는 ‘동정론’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총리실 내에서도 박 차관 유임을 원하는 기류가 팽배했다고 한다. 민간인 사찰 의혹이 불거질 당시만 해도 박 차관을 향한 원망이 폭주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의외의 현상이다. 앞서 언급한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김태호 내정자는 중앙무대 경험이 없고, 임채민 총리실장(장관급)은 정치 쪽에선 ‘신인’에 가깝다. 더군다나 이재오 의원이 특임장관으로 오면 정부부처 힘이 그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우리 총리실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 실세’인 박 차장이 총리실에 남아 든든하게 버팀목이 돼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검찰이 총리실 불법 사찰 등에 대한 중간수사를 발표한 이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검찰은 지난 8월 11일 민간인 사찰과 남경필 부인 사건 내사 등을 주도한 이인규 전 지원관 등 3명을 기소하고 1차 수사를 마무리한 바 있다. 소장파와 민주당 등에서 제기한 ‘윗선’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인수위 시절부터 박 차관과 갈등을 빚어온 정두언 최고위원은 검찰 수사에 대해 “군사독재 시대에나 있었던 정치인 사찰이 발생했으나 검찰이 적당히 덮었다”며 “검찰이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게 아니라 수사를 안 한 것이 분명하다”고 비난했다. 남경필 의원은 “(특정인이) 수사진행 방향을 보고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 사람이 몸통이거나 몸통의 일부일 수도 있는 만큼 그런 것까지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를 지켜본 후 대응하겠다던 소장파 측이 박 차관을 겨냥하며 칼을 빼든 것이다. 당시 소장파의 한 재선 의원은 “설마 했는데 검찰이 실무진 몇 명을 기소하는 데 그쳤다. 박 차장이 자리를 지키거나 다른 차관급으로 옮길 것이란 말도 나왔다. 정권 출범 이후 한 번도 바람 잘 날이 없던 사람을 이 대통령이 왜 계속 안고 가는지 모르겠다. 정면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소장파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 정운찬 총리 퇴임식 모습.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런 가운데 박 차관 본인이 ‘차선’으로 지식경제부를 원했고, 이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박 차관의 한 측근 인사는 “(박 차관이) 총리실에 남아 있는 것이 이 대통령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면 비교적 정치색이 덜한 지식경제부로 보내달라고 했던 것으로 안다. 지금까지 해왔던 자원외교를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박 차관도 내정 소식이 알려진 뒤 기자들과 만나 “수출이 부진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일부 지역, 중남미를 상대로 자원외교를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번 박 차관 인사를 놓고 여권 소장파는 ‘발끈’하고 나섰다. 소장파 의원들은 차관급 인사가 발표된 후 모임을 갖고 향후 대책 등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경필 의원 측은 “불법적인 사찰을 주도하고 권력을 남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자를 어떻게 다른 부처 차관으로 또 기용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일단 발표가 났기 때문에 철회는 되지 않겠지만 향후 검찰의 엄중한 수사를 촉구할 계획이다. 또한 우리가 나름대로 수집한 (박 차관 관련) 의혹들을 공개할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향후 여권의 권력 싸움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박 차관 측은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앞서의 박 차관 측근은 “이번 인사는 이 대통령이 박 차관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보여준 것”이라며 “자리까지 내놓고 다른 부서로 간 사람을 확실한 증거도 없이 비난해서야 되겠느냐. 이 대통령도 자꾸 내부 분란을 일으키는 소장파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면 우리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형님과 맞짱 뜰라…’
이재오 의원이 지난 8월 8일 특임장관으로 내정된 뒤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이 의원 입각 소식은 정치권에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발표 하루 전인 7일에 이 의원 발탁설이 흘러 나왔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7·28 재보선을 치른 지 10일밖에 지나지 않았고, 이 의원 본인이 그동안 국회에서의 활동을 강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이 의원 최측근으로 알려진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조차도 이 의원 내정 확정 소식을 8일 오전에 전해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선 그의 장관 발탁을 두고 자타공인 ‘2인자’인 이 후보자가 개헌과 4대강사업 관련 ‘특임’을 맡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향후 남북관계에서 어떠한 식으로든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도 퍼지고 있다. 이 후보자의 한 측근은 “아직 구체적인 미션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안다. 청문회가 끝나고 내각 인선이 마무리되면 뭔가 나오지 않겠느냐. 그중에서도 4대강 사업은 아마 이 후보자가 꼭 챙길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후보자는 대통령 선거 때부터 ‘4대강 전도사’로 불릴 정도로 이 사업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인사를 놓고 대통령 ‘형님’ 이상득 의원의 의중이 반영됐을 것이란 소문이 들려 시선을 끌고 있다. 이 후보자가 국회로 돌아올 경우 여권 주류 간 파워게임은 불가피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 의원이 이 후보자를 입각시켰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선 이 의원에 맞서 이재오계와 소장파가 손을 잡을 것이란 전망이 끊임없이 나온 바 있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이 후보자에게 특임장관을 처음 제안한 것은 7월 중순이었다. 재·보선에서의 승산이 높을 때였다. 국회로 오면 이상득 의원 쪽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또한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도 고려됐던 것으로 안다. 물론 특임장관으로서의 이 내정자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