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부회장. |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회계 자문사와 인수 자문사를 선정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한때 현대중공업과 KCC를 아우르는 ‘현대가 컨소시엄’을 통한 현대건설 인수 관측이 나돌았지만 점차 현대차그룹의 독자인수로 굳어져 가는 듯하다.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은 현대건설 인수 여부와 관련해 “관심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도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의 어떤 계열사가 현대건설 인수 주체로 나서게 될지가 관심을 끄는 가운데 재계 인사들은 건설 계열사 엠코를 주목하고 있다. 엠코는 지난 2002년 10월 종합건설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현대차그룹 계열사다. 주로 그룹 관련 공사를 수주하며 성장해온 엠코는 지난해 매출액 1조 806억 원, 영업이익 392억 원, 당기순이익 448억 원을 기록했다.
현대건설 인수 주체로 거론되는 엠코는 건설사라는 점 외에도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회사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는다. 정 부회장은 엠코 주식 501만 2621주(지분율 25.06%)를 보유하고 있다. 엠코가 인수 주체로 나설 경우 이 회사 최대주주인 정 부회장이 자연스레 현대건설 인수 작업 전면에 부상할 수밖에 없다.
정 부회장이 직접 현대건설 인수전에 나서 ‘왕회장’으로 불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혼이 깃든 현대건설 인수를 성사시킬 경우 ‘현대가 정통성 계승 주역’이란 명분을 통해 정 부회장의 승계 작업에 탄력이 붙을 수 있다. 자동차와 제철 외에 건설업을 그룹의 신성장동력에 추가해 ‘포스트 정몽구’ 시대의 새 그림을 ‘황태자’ 정 부회장이 직접 그려간다는 상징성도 부여할 수 있다.
그룹 주력인 현대차나 현대모비스가 현대건설 인수주체로 나서는 것보다 정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엠코가 전면에 서는 것이 정몽구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현정은 회장으로 인해 느낄 법한 부담을 덜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 정몽헌 회장 부인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건 상태다. 그동안 유족에 대해 온정적 자세를 보여 온 정 회장이 현대건설을 두고 현 회장을 향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가 재계의 관심을 끌어왔다.
현대차 측은 현대건설 인수전이 언론에서 ‘아주버니와 제수’ 간 대결구도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 반응을 보여 왔다. 현대차가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들더라도 정 회장이 직접 현 회장을 상대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룹 주력사 대신 정의선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엠코가 나서는 편이 나을 것이란 관측이다.
▲ 현대건설의 브랜드 ‘힐스테이트’. 현대차그룹 내 유일한 건설사이며 정의선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엠코가 현대건설 인수 주체로 나설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최근엔 엠코의 상장 시나리오도 등장했다. 그룹의 지원 속에 꾸준한 성장을 해온 엠코는 그동안 증권가에서 상장 요건을 충분히 갖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엠코가 현대건설 인수 주체가 될 것이란 기대감 속에 상장될 경우 글로비스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은 거액의 상장차익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엠코 상장으로 벌어들인 돈을 현대건설 인수자금 일부로 충당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일단 그룹에서 현대건설을 인수한 뒤 엠코와 합병시켜 우회상장시키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 됐든 현대건설 인수를 전제로 한 엠코의 상장 대박 시나리오는 정의선 부회장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전망이다. 여기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정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위한 주요 계열사 지분 매입에 나설 수도 있을 법하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순환출자구조를 이루는 계열사들 중 정 부회장은 기아차 지분 1.76%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최대주주인 정 부회장에 이어 엠코 2대주주인 글로비스도 정 부회장이 지분 31.88%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있는 회사다. 엠코의 상장 대박으로 글로비스가 누릴 이익이 높아지는 만큼 정 부회장에게 돌아가는 이익 또한 커지게 된다.
결국 엠코를 전면에 내세운 현대차의 현대건설 인수는 그룹의 신성장동력 탑재뿐만 아니라 정의선 부회장에게 승계 명분과 실탄까지 안겨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 회장에게 현대건설 인수는 현대가 맏형으로서 그룹 모태인 현대건설을 되찾아 선친의 유지를 받드는 동시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아들의 승계 작업을 원활하게 만들 수 있는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일인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제수씨 경영권은 안 뺏는다?
▲ 현정은 회장(왼쪽)과 정몽구 회장. |
현대그룹이 재무약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현대건설 인수전 때문이라는 관측이 대세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골자로 한 재무 약정을 받아들일 경우 현대건설 인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다.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은 최근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현대증권 등 주요 계열사의 현대건설 인수 참여 결정을 알리면서 현대건설에 대한 강한 의욕을 드러내고 있다. 현 회장의 현대건설 인수 목적은 ‘왕회장’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 계승을 통한 정통성 확보는 물론 현실적인 경영권 문제도 깔려 있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 지분 7.22%(보통주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만약 현대건설이 다른 세력에 넘어갈 경우 현대상선 지배권마저 위협을 받게 되는 셈이다.
현재 현대상선 최대주주는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으로 지분 22.14%를 보유해 현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20.60%)에 앞서고 있다. 항간에는 ‘현대차가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상선 지분을 현대중공업에 넘겨줄 것’이란 관측이 나돌기도 한다. 이럴 경우 현대중공업은 현대상선 지분 29.36%를 보유하게 돼 현대엘리베이터에 8.76%p 앞서게 된다.
지난 2003년 정몽헌 회장 사후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 갈등을 빚었던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도 현대상선 지분 4.27%를 갖고 있다. 현대건설이 현대가에 넘어갈 경우 현 회장은 어렵사리 지켜온 주력사 현대상선 경영권을 잃어버릴 수 있는 셈이다.
현대상선은 현대증권 지분 23.17%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즉, 현대가에서 현대상선 경영권을 획득하면 현대증권 경영권도 따라오게 된다. 이렇다 보니 증권가엔 벌써부터 ‘현대차가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증권을 자사 계열사인 HMC투자증권과 합병시킬지, 아니면 현대중공업 계열인 하이투자증권에 넘겨줄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현대상선은 ‘현대로지엠(옛 현대택배)→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로지엠’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현대상선 경영권을 빼앗기는 건 사실상 그룹 경영권을 내주는 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현정은 회장 입장에선 현대건설 인수를 통한 현대상선 경영권 수성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현대차 주변에선 ‘정몽구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 과정에서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까지는 빼앗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그동안 정 회장은 현대가 맏형으로서 유족들을 잘 챙겨왔다. 왕회장의 4남 고 정몽우 현대알미늄 회장의 장남 정일선 사장은 지난 2005년부터 현대차 계열 철강회사 BNG스틸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왕회장이 가장 아꼈던 동생 고 정신영 씨의 아들 정몽혁 회장은 정 회장 등 현대가 도움을 받아 지난해 말 현대종합상사 회장에 올랐다. 지난 8월 3일엔 왕회장 장남 고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의 장녀 정은희 씨 남편 주현 씨가 현대모비스 자회사 아이에이치엘(IHL)의 개인 최대주주 및 대표이사에 오르기도 했다.
정 회장 동생인 고 정몽헌 회장 부인 현정은 회장과 딸 정지이 현대U&I 전무, 아들 영선 씨도 정 회장에겐 엄연히 현대가 유족이다. 유족을 애틋하게 대해온 정 회장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더라도 현 회장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벌이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선이 제법 많은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현대차가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을 현 회장 측에 넘겨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현 회장이 오매불망 원했던 현대건설은 정 회장이 낚아채더라도 최소한 현 회장의 경영권을 지켜줬다는 명분을 얻게 되는 까닭에서다. 현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든 배경에 현대상선 지분 문제가 깔려있는 만큼 정 회장이 먼저 나서 이 부분을 해결할 경우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정몽구-현정은 두 사람 간의 갈등구도가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을 거란 관측 또한 무시하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