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21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오찬 회동을 하기 위해 만나 악수하고 있다.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95분 동안 파격적인 단독회동을 가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이번 회동에 대한 양측의 이해득실을 재고 있다. 일단 ‘윈윈’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이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동안 박 전 대표의 안정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이명박 정부의 성공).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의 공정한 경선 경쟁(정권 재창출 노력) 약속을 ‘공개적으로’ 받아내 차기로 가는 큰 돌부리 하나를 걷어낸 셈이 됐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그동안 견지해오던 친이계 중심의 정권 재창출에서 한 발 물러섬으로써 자파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후퇴’를 두고 세종시 수정안 투표 정국과 소장파-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 등과의 갈등에서 보여준 친이계의 충성심 결여가 결과적으로 이번 이 대통령의 ‘박근혜 배려’로 나타났다는 해석도 나온다. 친이계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이벤트로도 해석되는 8·21 95분 비밀회동의 막후를 들춰봤다.
이명박-박근혜 8·21 비밀회동은 극도의 보안 속에 이뤄졌다. 특히 이번 회동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정진석 신임 정무수석에게 준 선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 수석은 극도의 보안 속에 단독으로 박 전 대표의 삼성동 자택을 수차례 방문해 회담의제를 사전 조율했다고 한다. 정 수석은 한때 기자들에게 “나는 친박 인사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박 전 대표와 얘기하겠다”라고 큰소리를 쳐 기자들이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라며 그의 역할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큰소리가 맞았던 셈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홍상표 신임 홍보수석 등 다른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은 철저하게 배제된 것으로 알려진다. 홍 수석은 “만나는 낌새만 눈치 챘을 정도였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친박계 인사들도 거의 정 수석의 동선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조차도 회동 뒤 박 전 대표로부터 간단한 발표문 정도를 통보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 전 대표가 이번 회동의 중요성을 알고 자신이 직접 정 수석과 접촉하며 비밀회동을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 대통령은 비밀회동을 고집했을까. 그는 회동 직후 참모들에게 “박 전 대표가 (회동 내용을) 적절할 때 소개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내용에 대해 함구를 했다고 한다. 사실 ‘영수회담’에서 정무수석 등의 배석은 청와대의 중요한 의전 관례다. 그런데 아무도 배석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박 전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이 대통령의 정치적 배려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는 나중에 친이계 후보들이 ‘이심이 나한테 있다’라고 주장할 때 박 전 대표가 ‘근거 없는 얘기’라고 대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내가 대통령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런 언급은 없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박 전 대표에게는 친이계에 대항할 수 있는 큰 힘이 되는 반면, 두 권력자의 비밀회동에 아무도 ‘밀어 넣지’ 못한 친이계로서는 향후 대권 가도에 불안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양측은 95분 동안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이에 대해 친박 진영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4대강 사업이나 개헌 등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을 자리는 아니라고 본다. 이 대통령이 4대강 사업 등 국정 핵심과제에 대해 설명하고 박 전 대표가 이해를 하는 정도였지 않나 싶다. 항간에 떠도는 ‘대권 이면 합의설’과 같은 구체적 약속은 두 사람의 정치 성향상, 그리고 향후의 정치 가변성 등을 고려할 때 적절치 않다”라고 전제하면서 “이번 회동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양측 대화의 행간에 담긴 신뢰의 형성이다. 그동안 이 대통령은 친이계의 수장을 자임하며 박 전 대표를 차기 주자로서 인정하지 않는 듯한 스탠스를 취했다. 오히려 철저하게 견제하고 죽이려 했다. 그것이 18대 공천 학살과 그 이후 세종시 정국 조성 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대통령이 이번 회동에서 차기 대선 구도를 ‘박은 빼고’에서 ‘박도 넣고’로 바꾼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대통령의 전략적 후퇴 내지는 포용을 박 전 대표가 수용하고 만족감을 표시한 것이 본질이다. 반면 이 대통령도 남은 임기 정권의 성공을 위해 박 전 대표의 연대와 협조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이번 8·21 회동에 대해 “이 대통령이 모래처럼 결속력이 전혀 없는 친이계에 던지는 강력한 경고성 이벤트”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친박계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지난 세종시 수정안 투표를 할 때 친이계의 결속력에 대해 크게 실망한 것으로 안다. 대부분 이 대통령으로부터 공천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친이계 의원들이 세종시 투표에서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처신하자, 청와대가 막판에 뛰어다녀 겨우 100여 표를 확보한 것 아니냐. 권력 혜택을 받을 땐 청와대 이름을 팔면서 어려울 때는 피하는 것을 보고 대통령이 무엇을 느꼈겠느냐. ‘나중에 여권에 위기가 닥치면 나도 버림받고 어렵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최근 정두언 남경필 의원 등의 소장파와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과의 제2의 권력 갈등도 대통령이 점점 친이계를 믿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친이계에 대한 불신이 쌓이면서 이 대통령이 이번에 ‘박근혜도 차기 주자 중에 한 명으로 충분하다’라고 공개 천명해 자파에게 따끔한 경고를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대통령의 변화 움직임은 지난 7월 청와대 개편에서 그 단초가 드러났다. 그때 박형준-이동관-박재완 등 대표적인 ‘반박’ 인사들이 대거 물러났다. 소장파 등과 밀접한 관계인 이들의 주요 정무원칙은 ‘박근혜의 시대정신으로는 차기 대권을 차지할 수 없다’는 배제론이었다. 당연히 계파 갈등이 불을 뿜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국정을 총괄하고 계파를 초월하는 조정자가 아닌, 친이계의 수장으로 전락해 박 전 대표와 대립하며 지지율을 깎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신임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정진석 정무수석의 기조는 이전 참모들과 다른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계파 수장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국정의 총괄 책임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첫 결실이 이번 8·21 회동으로 나타났다. 박 전 대표도 임태희-정진석 라인에 대한 신뢰가 깊어 회동의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임태희 실장의 경우 한때 ‘박근혜 전 대표 사람’으로 분류될 만큼 친박과 인연이 깊다. 그리고 이번 회동의 핵심 메신저였던 정진석 정무수석의 경우 옛날 민자당 출입 정치반장 등을 거친 오랜 현장경험과 합리적인 성향으로 친박의 ‘추인’을 받았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 쪽이) 지난 청와대 개편에서 임 실장과 정 수석을 쓰는 것을 보면서 그 전 인물들과 다른 평가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계파를 초월해 국정 총괄리더로 서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탈박’ 김무성 원내대표는 최근 이 대통령이 가장 자주 찾는 최측근이 됐다. 여의포럼과 같은 계파성 모임을 해체하려는 의지도 보이고 있다. 또한 최근 친이계 대권주자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비판한 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가 “경기도나 잘 챙겨라”며 직격탄을 날린 것도 기존 친이계 중심 노선에서 보면 의외라는 평가다.
이런 이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 친이계가 긴장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특히 이 대통령의 ‘박근혜 후계자 인정’ 기류에 대해서는 강하게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이재오 특임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김문수 경기지사가 후보로 나서면 적극 지원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박근혜 배제’를 전제로 한 수도권 친이계의 정서를 ‘여전히’ 대변하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또한 이 대통령이 ‘밀고 있는’ 김태호 총리 내정자 인준을 두고 친이계 핵심인 심재철 의원과 소장파 정태근 의원 등이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는 것도 최근 이 대통령의 ‘반 친이계 성향’에 대한 반발 기류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친이계는 이 대통령의 ‘변심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 대통령의 친이계 중심 정권 재창출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신뢰에서 나온다. 한 친이계 의원은 “이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공정 경선 관리를 조건으로 박 전 대표를 국정의 협조자로 묶어 놓은 뒤 경선에서 패퇴시킬 반격의 수를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대의원 분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친이계가 단일 후보만 내세운다면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이 대통령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친박계도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이 대통령은 언제든지 박 전 대표를 내칠 것’이라는 의심을 아직 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95분 동안 ‘오월동주’ 입장에서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남은 임기 동안 조용하게 묶어놓은 뒤 2012년 경선에서 잡자’는 생각과 ‘정권 재창출 가는 길에 재만 뿌리지 않으면 좋다’는 생각으로.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보수층 세우고 ‘허리’ 다치면?
하지만 그런 강경책은 이번 회동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박 전 대표가 일단 이 대통령과의 연대를 통한 온건책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이번 회동으로 대권가도의 불확실성 하나를 확실히 제거하는 획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 이 대통령이 중립을 지키고 경선관리를 엄격하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만으로도 다른 친이계 의원들에게 ‘이심이 박 전 대표에게도 있다’라는 간접적인 사인을 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심’ 논란이 벌어질 때 박 전 대표가 회동사실을 언급하며 ‘약속위반’이라고 항의할 경우 이 대통령으로서도 난처한 입장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한나라당 경선까지의 ‘예선’에 관한 정치적 이득이다. 과연 이번 회동이 2012년 12월 대선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박 전 대표가 일정 정도 국정 협조를 약속한 이상 ‘이명박 정권 2기’의 리더로 각인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친박 진영에서는 박 전 대표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원칙주의자라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스타일이나 철학과는 전혀 다른 정치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4대강 사업 찬성 등 여론과 배치되는 행보로 이 대통령과 연대 전략을 이어갈 경우 그 후유증이 누적돼 차기 대선에서 반 이명박 진영의 반격으로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이번 회동으로 보수층 일부로부터 더 이상 무책임한 반대자가 아닌 협력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넓은 중도층으로부터 ‘이명박 아바타’ 이미지로 다가가 결정적 승기를 놓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같은 배를 탔지만 동지는 아니다’라는 마술 같은 차별화를 박 전 대표가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