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7급 공무원>의 한 장면.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
일명 나영이 사건, 강호순 사건, 김수철 사건 등 사회적으로 파장을 몰고 온 성범죄 사건들은 특히 여성 직장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자 안전에 애를 쓰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L 씨(여·30)도 얼마 전 벼르던 호신용품을 마련했다.
“한번은 퇴근길에 어떤 남자가 따라오는 거예요. 혹시나 싶어 속도를 냈는데 여전히 따라와서 엄마랑 전화하는 척하면서 집으로 막 뛰어 들어갔던 경험이 있어요. 정말 가슴이 너무 떨려서 그때부터 호신용품을 꼭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지난주에 큰 소음을 내는 것부터 전기충격기, 스프레이형 호신용품 등 여러 가지를 비교해서 구입했는데 그렇다고 100%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에요. 호신용품만 믿고 있을 수 없으니 늘 조심해야죠.”
L 씨는 회사에 가서도 여직원들끼리 모이면 종종 호신용품이나 호신술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예전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고. 그는 “각자 구입한 호신용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괜찮은 제품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며 “퇴근 후 여직원들끼리 갖던 저녁 모임도 횟수가 부쩍 줄었다”고 이야기했다. 환경 제품 제조 회사에 다니는 J 씨(여·28)는 스스로를 지키느라 좀 더 큰돈이 들었다. 안전을 위해 집을 회사 근처로 옮겼다는 것.
“친구와 지금까지 월세 반지하 방에 같이 살았어요. 그때는 아무래도 둘이 같이 있어서 그런지 위험하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집세가 저렴해서 좋았죠.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어요. 지난달에 친구가 결혼을 하게 돼서 혼자 살게 됐는데 뉴스를 보니 반지하 주택에 사는 여성을 노리는 범죄자들이 많더라고요. 동네 입구가 좀 어두워서 퇴근할 때는 저녁시간에도 불안했고 그래서 아예 대출을 받아서 이사를 했어요.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매일 밤 불안에 떨며 자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자력으로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여성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스포츠 관련 일을 하는 C 씨(여·32)는 퇴근길에 늘 남편을 ‘보디가드’로 대동한다.
“원래 시골 출신이어서 대학 때도 밤길 무서운 줄 모르고 잘 돌아다니고 그랬어요. 사회생활 하면서도 몸 사리고 겁 많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마음이 안 그래요. 하도 끔찍한 사건을 많이 접하다 보니까 길가는 사람이 저 혼자면 괜히 불안하고 맞은편에 걸어오는 사람이 남자면 혹시 흉기를 감추고 있진 않을까 오싹할 만한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남편 회사는 몇 정거장 떨어져 있는데 이달부터는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갑니다.”
C 씨는 여자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한테도 배우자나 남자친구와 같이 퇴근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아직 실행하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다고. 그는 “좀 오버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면서 “한 직장동료 남편은 ‘얼굴이 무기니 그냥 혼자 가라’고 한다는데 군말 없이 와주는 남편이 고맙기만 하다”고 덧붙였다.
웹디자이너로 일하는 K 씨(여·26)는 유흥생활도 저절로 접게 되고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말한다.
“저도 그렇지만 요새 뉴스 보면서 느끼시는 게 많은지 엄마가 퇴근시간인 6시만 넘으면 빨리 들어오라고 성화예요. 금요일 밤에도 어지간하면 약속을 잡지 않고 토요일이나 일요일 낮에 친구들하고 약속을 잡는 편이죠. 다들 참 건전해졌다고 웃으면서 말해요. 야근 안 하려니까 당연히 낮에 일도 열심히 하게 되죠. 어릴 때는 새벽까지 놀고 택시 할증요금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택시 타고 귀가한 적도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요.”
리서치 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33)는 잦은 야근 때문에 이직까지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지금 회사는 툭하면 밤 11시를 넘기고 때로 새벽 한두 시에 퇴근할 때도 있어 불안하다.
“제가 평소에도 야근이 많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툴툴거렸거든요. 그랬더니 아는 분이 자리 하나를 소개 시켜 줬어요. 나름 안정적인 곳이었지만 연봉이 적어서 크게 마음이 동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자꾸 여성 관련 범죄 소식이 들려오는 데다 결정적으로 며칠 전에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밤길이 더 무서워진 거예요. 아무리 콜택시를 부른다 해도 밤늦은 시간에 다니다간 큰일 날 것 같더라고요. 영화지만 그 무서운 상황들이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흉흉한 세상이라 여성들이 몸을 사리게 되는 건 당연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강력 범죄는 점점 늘어나는데 주변 환경이나 정부의 대책은 이렇다 할 보호막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조사한 설문에서도 이러한 여성 직장인들의 불안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설문에 응한 603명의 남녀 직장인들의 대부분이 큰 불안감을 지니고 귀가시간을 앞당겼다고 답하고 있다. 응답자 중 여성 직장인들의 50.8%는 ‘앞으로 호신용품을 구매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답했고, 40%가 넘는 사람들이 ‘어두운 밤길이 가장 무섭다’고 답했다.
직장인 P 씨(29)는 남자지만 퇴근길이 너무 늦거나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을 걸어갈 때면 오싹함을 느낀단다. 그는 “지난 금요일에 누나가 퇴근시간이 지났는데 밤늦게까지 연락도 안 되고 귀가하지 않아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었는데 친구와 찜질방에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지 않고 오히려 안심이 됐었다”며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