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 비대위 대표. 뉴시스 |
참여정부 초기이던 지난 2003년 4월 17일 대북송금 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송두환 특검’이 출범했다. 2000년 6월 15일 이뤄진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정상회담을 전후로 거액의 돈이 북한으로 송금됐다는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서였다. 김 전 대통령은 최근 발간된 자서전 <김대중 자서전>에서 특검을 수용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를 통해 “특검은 송금의 절차적 위법성 문제만 수사했다. 다른 것은 손대지 않아 남북관계에 큰 타격은 없었다. 김 전 대통령도 나중에는 이해를 하셨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특검수사는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 확산됐다. 특검에 출두한 이익치 전 현대증권 사장이 “2000년 4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으로부터 현대건설 소유의 양도성예금증서(CD) 150억 원을 받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던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이 발단이었다. 이에 대한 확인 작업에 나섰던 특검은 김영완 씨가 CD를 명동사채시장에서 세탁한 것을 확인했으나 그때는 이미 김 씨가 미국으로 잠적한 뒤였다. 2003년 6월 25일 특검은 대북송금 개입 혐의(직권남용)를 적용, 박지원 대표를 구속기소했다. 150억 원을 수수한 부분에 대해서는 김 씨의 소재가 오리무중인 터라 ‘참고인 중지’ 결정을 내렸다.
특검으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본격적으로 박 대표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당시 대검 중수부는 문제의 CD가 이익치 전 회장과 김영완 씨를 거쳐 현금화되는 과정을 포착했으나 그 돈이 박 대표에게 건네진 것은 입증하지 못했다. 대신 “박 전 장관의 비자금 150억 원을 관리해왔다”는 김 씨의 자필진술서를 근거로 2003년 9월 박 대표를 구속기소했다. 박 대표는 1심과 2심에서 각각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나 2004년 11월 대법원으로부터 ‘150억 원 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 씨가 해외에서 작성했다는 진술서의 신빙성과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수부를 포함한 검찰 간부들은 “김 씨만 법정에 나왔더라면 박 대표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이에 대해 박 대표 측은 “결코 돈을 받은 일이 없다”면서 “김 씨가 내 이름을 팔아 벌어진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또 김 씨가 박 대표의 재산 관리인이라는 일각의 의혹에 대해서도 “친한 사이가 아니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 김영완 |
그 이후 한동안 들리지 않던 김 씨 이름은 2008년 6월경부터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검찰이 대우그룹 구명로비와 주가조작 등의 혐의를 받고 있던 재미교포 무기중개상 조풍언 씨를 구속했던 무렵이다. 조 씨와 김 씨는 무기사업을 하면서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고, 2006년과 2007년엔 LA 등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 현지 교민들에 의해 여러 차례 포착되기도 했다. 김 씨와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조 씨는 2008년 3월 자진 입국해 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는 “조 씨가 국내로 들어와 면죄부를 받는 대신 전 정권의 무기사업과 관련된 자료를 건넸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조 씨는 지난해 6월 재판에서 대우그룹의 해체를 막기 위한 정·관계 로비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조 씨를 조사하면서 김 씨 행방에 대해서도 추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 소환에 성공할 경우 수많은 의혹을 남긴 채 덮어야 했던 대북송금 및 현대비자금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조 씨 수사에 관여했던 한 검찰 관계자는 “김 씨의 한국 재산은 강남 일대 건물을 포함해 수백억 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가 이것을 되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정황도 포착했다. 그래서 입국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조 씨를 통해 김 씨와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당시 검찰 내에선 김 씨가 대선 과정에서 이 대통령 측과 대립각을 세웠던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조 씨는 당초 국내에 들어오기 전 지인들에게 “한국 체류가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국이 계속 미뤄지자 이를 지켜본 김 씨가 불안해했을 것이란 말도 들렸다.
여권 핵심부가 적극적으로 김 씨의 소재 파악에 나선 것은 지난 7월 중순경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이 6월 말경 김 씨 주소지에 대한 제보를 입수했고, 확인 결과 근거가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도 이를 보고 받고 김 씨를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후 국정원은 미국 현지 직원들을 중심으로 김 씨 행적을 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의 국정원 관계자는 “김 씨 관련 부분은 아직 공개할 만한 수준이 아닐 것이다. 조금씩 실체에 접근 중이다. 일각에선 알면서도 소환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검찰에서도 김 씨를 데리고 와 지난 2003년 중수부의 치욕을 되갚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검찰 최정예 팀인 중수부는 당시 박 대표의 혐의 입증을 자신했으나 결국 재판에서 박 대표 측에 패했다. 현재 검찰은 김 씨의 입국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고 판단, 특검 및 중수부의 당시 수사 자료들을 꺼내들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한 검찰과 변호사를 지냈던 한나라당의 한 의원도 자체적인 첩보를 바탕으로 김 씨를 둘러싼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러한 여권 핵심부의 움직임에 민주당 측에선 조심스러우면서도 우려하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아직 어떠한 것도 드러난 게 없어서 말하기가 곤란하다. 뭔가 공개되면 입장을 밝힐 것”이라면서도 “당시 특검팀이나 검찰이 김 씨를 DJ 정권 실세의 재산관리인으로 지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박 대표를 겨냥한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민주당 내에선 김 씨가 10월 초 열릴 국정감사 전에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청문회와 국정감사 등에서 ‘저격수’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던 박 대표의 활동을 위축시키려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민주당 중진 의원은 “이번 국정감사를 비롯해 앞으로 총선과 대선에서 박 대표의 정보력과 인맥은 민주당의 최고 무기다. 7년이 지난 사건을 다시 꺼내겠다는 의도는 누가 봐도 불순하다”고 분개하면서 “김 씨는 BBK 사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여권 입장에서도 어떻게 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다. 그 전에 미리 찾아내 ‘입막음’을 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