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서도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유독 기억난다. 그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가장 어려울 때에 8군사령관직을 수행했다. 미 2군사령관이던 그는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을 맡아 가장 오랫동안 한국전쟁을 지휘했고, 이후 군 경력을 마감했다. 그는 1차대전 때는 퍼싱(Pershing) 장군휘하에 있었고, 2차대전 때는 8연대장으로 1944년 6월 유타 비치 상륙에 이바지했고, 패튼(Patton)의 3군에서 근무했다.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전투와 한국군 증강 양면에서 헌신했다. 그는 이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통솔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웨스트포인트 같은 4년제 사관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1952년 4월, 육사가 진해에 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육사가 군사 원조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정부예산으로 운영되어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 궁색했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여러 경로로 모금 활동을 벌여 육사가 태릉으로 이전한 후 이 모금으로 도서관을 세우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또 한국군을 속초 남쪽 FTC(Field Training Command)에서 1개사단씩 훈련도 시켰고 매 6개월마다 보병 150명, 포병 100명씩을 뽑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5차에 걸쳐 6개월간씩 작전교육을 시켜 최전방에 지휘관이나 작전장교로 투입했다.
조지아주 포트 베닝(Benning)의 보병박물관에는 한국군 졸업생 1000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군단장, 사단장급은 캔자스(Kansas) 주의 포트 리벤워스(Leavenworth) 육군참모대학에 보내졌다. 백선엽, 정일권, 장도영, 최영희, 송요찬, 임부택, 이종찬, 정내혁, 박병권 등이다. 밴 플리트 장군은 퇴임 후 플로리다 주 폴크 시티(Polk City)에 살았는데 사는 지역의 거리가 ‘밴 플리트 스트리트’라고 명명될 정도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1992년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밴 플리트 장군은 다른 8군사령관과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사령관들은 영전해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본국에 가서 퇴역을 하면 한국으로 출장이나 오는 정도였는데 밴 플리트 장군은 달랐다. 한국과의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해 지속적으로 한국의 발전을 도운 것이다.
일단 밴 플리트 장군은 위대한 군인이었다. 2차대전 때 용맹을 날렸지만 비슷한 이름을 가진 장교로 마샬(Marshall) 참모총장이 오해해 진급을 못하다가 마샬장군이 오해임을 인정하고, 곧 사단장, 군단장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2차대전 후에는 미군 지원단으로 그리스의 게릴라를 소탕해 공산화를 막았다. 또 그는 한국전쟁 중 공군 대위인 아들을 잃기도 했고, 백선엽 사령관을 시켜 지리산 공비를 소탕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필자가 속했던 보병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춘천을 점령, 사단사령부가 춘천 소양강변에 잠깐 머무르면서 화천과 9만리 발전소를 향해 진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Ridgeway) 극동군사령관과 함께 독려 차 사단사령부에 왔었다. 당시 춘천시내 가옥들은 빈집이었다. 곧이어 이승만 대통령도 왔다. 밴 플리트 장군은 포탄공격을 무진장 퍼붓게 했고 한국군 보병대령들을 3개월간 포병 훈련을 시켜 준장으로 진급시켰는데 그것이 포병 증강에 기여했다. 박정희 장군도 그중의 하나다.
좀 자세히 설명하면 1951년 5월 18일 밴 플리트 장군 지시로 미군은 무려 4만 1000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중공군 등 침공군을 최대한 징벌하라는 것이 그의 명령이었다. 5월 18일 야전지휘관 회의를 용평에 소집해 놓고 현지에 오는 도중 적의 포화로 그가 탄 L19 연락기가 기름을 흘리면서 겨우 착륙한 일도 있다. 정말이지 최고 지휘관이 목숨을 내놓고 최전방을 지휘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1951년 6월에는 일본에 있는 16군단을 포함해서 4개 군단으로 원산 밑에 상륙함과 동시에 금강산을 협공, 39도선까지 진격하는 작전명령을 일괄적으로 내렸으나, 리지웨이 극동군사령관의 동의를 못 얻어 시행되지 못했다. 진격 준비하던 백선엽 군단장은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 같다. 미국은 이미 휴전회담으로 가고 있었고 전선은 참호전 등 고착상태에 들어갔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 소강기를 이용해 한국군의 사단급 훈련과 도미 유학 등으로 한국군 증강을 유도한 것이다.
▲ 5·16 후 밴 플리트 장군이 미국 경제인단을 이끌고 방한, 송요찬 내각수반과 회담을 했다(위). 필자의 집에 방문한 밴 플리트 장군(맨 왼쪽). |
그에 대한 모든 예우를 경무대가 맡았지만 차량은 육군참모총장실에서 나가고 참모총장이 전속부관을 차출했다. 이때 필자도 그를 더욱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무척 예의가 바르고 마음이 따뜻했다. 한번은 필자에게 고마웠는지 미국으로 귀국 후 50달러를 보내왔다. 한국을 떠날 때 주지 못하고 돌아와서 보내는 것에 양해를 구하는 편지와 함께 말이다. 50달러는 그때 큰돈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반도호텔 809호실 스위트룸에 머무르면서 수시로 경무대와 연락, 각 부처 장관들과 미 대사관을 방문하곤 했다. 1959년에는 태풍 ‘사라’가 부산을 휩쓸고 가자 김종오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부산 피해지역을 방문, 위문하고 제주도 목장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기억난다. 당시 밴 플리트 장군의 부인도 와 있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가 경무대 경찰을 시켜 경무대 뒷산에서 나오는 물을 보내왔다. 물이 떨어지면 연락하라는 박찬일 비서관 말대로 물이 떨어져 연락을 했더니 경무대 경찰이 ‘누가 연락했느냐’고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하지만 밴 플리트 장군 쪽임을 알고는 즉시 물을 보내왔다.
또 한번은 일요일 오후에 갑자기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드라이브 하자고 곽영주 경무관을 대동하고 반도호텔에 왔다. 이 대통령은 밴 플리트 장군이 내려올 때까지 차에서 기다렸다. 함께 남산으로 드라이브를 하는데 순경들이 거적때기로 하꼬방(판잣집)을 가리려고 하고 있었다. 거적때기로 가려도 판잣집은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 눈치를 보니 모르는 척하고 밴 플리트 장군과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이때는 곽영주 경무관이 수행하고 경무대 경찰서가 경호를 맡고 있었다. 이렇게 한국의 어려웠던 시절을 잘 아는 밴 플리트 장군인 만큼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을 누구보다 놀라워했고, 또 기뻐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과의 인연이 끊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61년 들어선 군사정권이 가장 필요한 것은 미국의 지원, 즉 미국의 경제원조, 군사원조였다. 송요찬 전 육군참모총장이 국방장관이 되고 이어서 내각수반이 되자 밴 플리트 장군과 연락이 되었고 미국에서도 한국군부와 대화가 되는 밴 플리트 장군이 진상을 알아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때 백선엽, 정일권 장군 등은 외국에 대사로 나가 있었고 장도영 장군은 실각하여 구금 상태에 있었다. 한국동란 중에 제일 오래 전쟁을 수행하고 한국군 증강에 노력하고 교육기관을 만든 밴 플리트 장군은 박정희 장군 등 5·16세력한테도 존경받고 있었다.
7월 들어 밴 플리트 장군이 방한해 박정희 의장, 송요찬, 김종필 등과 만나더니 얼마 후 다시 대대적인 경제인 그룹을 인솔하고 왔다. 블로크녹스(Blawknox), 웨스팅하우스(Westing House), 걸프 오일(Gulf Oil) 등 각 분야의 사장단이었다. 또 한국전쟁 중에 사귀었던 김활란, 임영신 여사 등과도 자주 연락을 유지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1차 외유 때도 미국에서 산업시찰(Blauknot, Gulf, Reynold)을 하고 미국 유력인사를 만날 수 있게 도왔고, 그것이 결국 한·미경제협력을 돕는 길이 되었다. 한국의 국력이 약하고 로비의 힘이 없을 때였다. 김현철 특사가 미국으로 왔을 때는 빌 로저스(Bill Rogers) 전 국무장관들을 초청, 만찬도 주선했고 1957년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직접 만들어 한국의 대변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종식 후 미국이 휴전하는 대가로 약속한 한국의 부흥에 전념할 때 한미재단(American Korean Foundation)이 탄생했고, 한미재단(데마코 이사장, 로이쵸크 부이사장)은 가주택 건설, 서울시내 전차기증, 병원건설, 직업학교 건설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도 처음에 잠깐 관여하다가 곧 손을 놓고 그와는 별도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만들었다. 한국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늘 최선을 다해서 한국을 도왔다.
지난 6월 초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밴 플리트 상을 받았다. 이 상은 밴 플리트 장군이 작고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1992년부터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에 크게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김철수 세계무역기구 사무처장(1995), 제임스 레이니 대한민국 주재 미국 대사(1996), 구평회 한국무역협회장(1997), 최종현 SK그룹 회장(1998),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2000),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2004), 조지 H. W. 부시 전 미대통령(2005),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2006), 김대중 전 대통령(2007),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2009) 등이 이 상을 받았다.
밴 플리트, 그는 한국을 방어한 최고사령관, 한국군 현대화를 도운 미국 지휘관, 한국의 부흥을 위하고 한국을 대변하는 할아버지로 한국사에 영원히 기억될 만하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