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골키퍼 조수혁에게 2020년은 잊지 못할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활약해온 조수혁에게 2020시즌은 잊지 못할 시간이 됐다. ‘준수한 백업 골키퍼’ 정도로만 팬들에게 알려졌던 그가 소속팀 울산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관심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조수혁은 이번 대회 울산이 치른 10경기 중 9경기에 나서 6실점을 기록했다. 0점대 실점률로 울산의 우승에 기여했다. 국가대표 골키퍼 조현우의 활약에 막혀 FA컵, K리그에는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지만 연말 재개된 챔피언스리그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 누구보다 특별한 연말을 보내고 있는 조수혁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자가격리 중인 관계로 전화 통화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K리그 선수로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대회에서의 우승, 우승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펼쳐 들떠 있을 법했지만 조수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지만 생각보다 우승의 여운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면서 “대회를 마치고 귀국과 동시에 2주 자가격리에 돌입했다. 공항에서 ‘카메라 세례’도 받고 울산에서도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데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왔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이지만 당분간은 혼자라도 기분을 만끽하려 한다. 자가격리 기간만큼은 좀 거만한 태도로 지내겠다(웃음). 2021년부터는 다시 ‘겸손 모드’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승을 실감할 수 있는 경로는 온라인뿐이었다. 그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팬분들은 물론 결승전 상대였던 페르세폴리스의 ‘안티’인 이란 분들이 팔로를 많이 해주셨다”며 웃었다. 조수혁이 2019년 8월 개설해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 ‘베리나히쑤’도 구독자가 늘었다. 그는 “결승전 직후 구독자 200명이 증가했다. 누군가는 적다고 하겠지만 전체 구독자가 8000명 남짓인 나에게는 굉장히 많은 숫자다”라며 웃었다.
조수혁은 이번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K리그, FA컵을 포함해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조수혁은 이번 우승으로 K리그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우승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운이 좋은 선수인 것 같다. 선수들이 잘해줘서 나는 묻어갈 수 있었다”라며 겸손함을 보였다. 그는 이번 우승의 원동력으로 ‘즐기는 자세’를 첫 손에 꼽았다.
“우리 팀이 앞서 준우승만 했다. 그래서 외부에선 다르게 생각하실 순 있다. 하지만 팀 내에서는 압박감이나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모든 선수들, 코칭스태프, 직원들도 즐기면서 경기에 임했던 것 같다. 우승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현재 우리 팀 멤버로 하는 마지막 대회일 수 있었기에 좋은 추억을 남겨보자는 생각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멤버들이 다음 시즌까지 그대로 간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축구를 오랫동안 했는데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좋은 멤버라고 생각한다. 선수들 간의 분위기는 참 좋았다. 2021년에도 그대로 갔으면 좋겠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백업 골키퍼이지만 아시아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만큼 조수혁 또한 다른 팀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그는 “울산과 계약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다음 시즌도 울산 유니폼을 입을 확률이 높다”면서도 “더 먼 미래는 모르겠다. 나도 내 앞날이 궁금하다”고 설명했다.
조수혁은 우승 과정에서 빗셀 고베와의 준결승을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았다. 1-1 동점으로 경기가 지속돼 연장까지 치른 우승의 고비이기도 했다. 그는 “경기가 꼬이는 상황이 많이 나왔고 연장전까지 치렀다”면서 “어려운 경기에서 결국은 승리했다. 더욱 분위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결승전은 편안하게 치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장 후반 막판까지 동점 상황이 이어졌기에 승부차기에 돌입할 수도 있었다. 그 역시 승부차기를 대비하고 있었다. “승부차기를 해도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승부차기는 실력보다 심리적인 면이 많이 작용한다. ‘비법’을 밝힐 수는 없지만 승부차기를 한다면 구상하는 그림도 있었다”며 웃었다.
이번 대회는 다년간 백업 골키퍼로 머물던 조수혁이 재평가를 받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2008시즌 FC 서울에서 데뷔해 인천 유나이티드를 거치며 김병지, 권정혁, 유현, 김용대, 조현우 등 실력자에 가로막혀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하고 연령별 대표에도 선발되는 등 두각을 드러냈지만 커리어 내내 강한 팀 내 상대와 경쟁을 이겨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그는 “‘내가 저 선수를 이겨야 해’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하는 운동에 집중하려 한다”면서 “지도자가 나 아닌 경쟁자를 택한다고 해서 섭섭해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선수로서 잘못된 태도라고 생각한다. 항상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주전 경쟁을 펼치고 있는 국가대표 골키퍼 조현우와의 관계도 좋다. 그는 “너무 잘 지내고 있다. 내 유튜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출근을 함께하기도 하고 이번 대회 기간에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전했다. 자가격리에 돌입하자 조현우가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조수혁은 “카타르에 함께 가지 못했던 현우가 과일을 일일이 포장해 바구니를 만들어서 선수들에게 선물했다. ‘비대면’으로 각자 집 앞에 두고 갔더라. 너무 고맙다”라고 소개했다.
조수혁은 이번 대회에서 선방 능력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킥 능력도 과시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조현우가 코로나19 문제로 빠진 이번 대회에서 조수혁은 주전으로 나서며 선방 능력은 물론 킥력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킥에 자신 있었다. 많이 보여드릴 기회가 없어서 보시는 분들이 잘 모르셨던 것 같다. 아마 팀 동료들은 내 킥력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웃음). 골키퍼 트렌드가 달라지고 있다. 골키퍼 킥 능력의 중요성이 더 강조된다. 나로서는 반가운 상황이다. 다만 요즘 어린 선수들은 다들 킥이 좋다. 견제가 된다”며 웃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시아 최고 무대에서 뛰던 조수혁은 현재 ‘유튜버’로서 삶을 살고 있다. 대회가 열린 카타르에서 돌아와 자가격리 기간을 거치며 방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유튜브 채널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최대한 이 시간을 활용하려고 한다. 다만 너무 같은 일상이 반복돼 보시는 분들이 지루해 하실까봐 걱정이다. 격리기간 동안 게임도 하고 있는데 게임 영상은 편집이 어렵다(웃음). 유튜브는 촬영부터 편집까지 다 혼자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튜버 겸업은 팀 동료 김보경(현 전북)과 정동호의 도움이 컸다. “2019년 심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먼저 유튜브를 개설한 김보경이 ‘형도 해보라’며 권유했다. 아내, 강아지와 함께 영상을 찍어 추억을 남겨 놓자는 생각에 시작했다.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동호는 ‘베리나히쑤’라는 채널명을 지어줬다. “채널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동호가 옆에서 ‘베리나이스~’라고 외치더라. 우리집 강아지 이름이 ‘베리’다. 아내 이름 중 ‘희’, 조수혁의 ‘수’를 붙여서 ‘베리나히쑤’라고 만들게 됐다”면서 “동호는 이외에도 자주 출연해서 도와준다. 워낙 평소에 재미있는 스타일이다. 김인성, 이청용 같은 친구들은 영상에서 과묵하게 나오는데 그 친구들은 카메라 앞에서 ‘콘셉트’를 잡는 것이다. 멋있는 척하려고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유튜버, 축구선수 겸업으로 바쁘지만 조수혁은 “당연히 축구선수가 우선이지만 유튜브 역시 나와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다. 가장 중요한 축구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지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가 그라운드에서 버티고, 영상 편집까지 겸하게 하는 원동력은 가족이었다. 조수혁은 “이번 우승으로 가장 기뻐한 사람이 아내였다”라며 “처음엔 그저 건강하게 돌아오길 바랐지만 대회가 지속되며 누구보다 우승을 빌어줬다. 그동안 축구를 하면서 얻은 결과 중 가장 기뻐하더라”라고 전했다.
프로 입단 13년 차, 2021년 한국나이로 34세가 되지만 조수혁은 “마흔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2021년에도 베리, 아내와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