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추도식에서 정상영 KCC 명예회장(왼쪽)과 정몽준 의원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지난 8월 19일 KCC는 공시를 통해 정상영 명예회장으로부터 경기도 일대 토지 4만 5136㎡(약 1만 3678평)과 연건평 501.15㎡(약 152평) 규모 건물을 205억 1719만 7000원에 사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해당 부동산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102-19 외 3필지 토지, 마북동 102-21 건물, 그리고 여주군 여주읍 연양리 304-15 외 1필지 토지다. KCC 측은 공시를 통해 이 부동산을 ‘체육시설용지 등 취득을 통한 임직원 복지 향상’ 목적으로 매입한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이 부동산 매각 대금으로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KCC 관계자는 “(명예회장님) 개인 재산 활용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일단 자사 지분 확보용은 아닌 듯하다. 정 명예회장 측은 이미 KCC에서 49.31%의 우호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장남 정몽진 회장이 17.76%를 보유해 승계 작업도 사실상 마무리된 상태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외부 투자를 위한 실탄 장착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재계 일각에선 정 명예회장이 사유지를 회사에 팔아 거액을 마련한 배경을 두고 “현대건설 인수전을 염두에 둔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현재 현대가 장자 격인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을 중심으로 정 명예회장의 KCC, 그리고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 등 현대가 기업들이 공조하에 현대건설 인수전에 나설 것으로 점쳐지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정몽진 KCC 회장은 지난 7월 20일 경기도 양평 용담리 선영에서 열린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4주기 추도식에서 “현대가 컨소시엄 구성은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현대건설 인수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바 있다.
현재 재계에선 현대차를 중심으로 범현대가가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그룹 주력 계열사 현대상선 지분 7.22%(보통주 기준)의 향배에 대한 관측이 분분하다.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22.14%를 갖고 있으며 KCC도 지분 4.27%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차가 현대가 기업들의 지원하에 현대건설 인수에 성공하고 나서 현대건설 보유 현대상선 지분을 현대중공업이나 KCC에 넘길 경우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경영권 수성에 빨간불이 켜지게 된다. 이런 시점에 정 명예회장과 KCC 간에 부동산 거래가 이뤄지자 정 명예회장이 여기서 마련한 자금으로 현대건설이나 현대상선 지분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이다.
▲ 정상영 명예회장이 매각한 마북동 일대 토지. 사진출처=네이버 파노라마 캡처 |
삼촌-조카 간의 마북동 102-19 토지 거래는 지난 2003년 12월 정 명예회장이 발표했던 석명서(釋明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이때는 정몽헌 회장이 2003년 8월 사망하고 나서 정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사들여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경영권을 위협하던 시점이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석명서를 통해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세운 현대그룹의 전통이 훼손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현대그룹 경영권 인수를 추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른바 ‘정씨 현대론’을 역설한 것이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 행사의 부당함을 역설했지만 고 정몽헌 회장에게는 애정이 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마북동 102-19 토지 거래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석명서에서 “평생 동안 정몽헌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다”며 “2001년 12월 정몽헌 명의 용인 소재 토지를 사달라고 하여 사주기도 했다”고 밝힌 것이다. 이 토지가 정 명예회장이 최근 KCC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용인시 마북동 102-19 소재 땅이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정몽헌이 대출에 어려움을 겪자 본인 소유 KCC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며 290억 원 자금을 대출받도록 했다”며 조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울 성북동 33×-××6에 위치한 현정은 회장 자택은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인데 이 집 등기부엔 정몽헌 회장이 생전에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이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다 쓴 흔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 사후 부인 현정은 회장과 정 명예회장은 경영권 분쟁 등을 겪으며 앙숙이 된 상태다.
▲ 현정은 회장 |
게다가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가 현대건설 인수전에 나설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 회장의 현대건설 인수 전망은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 명예회장이 한때 현 회장 남편 명의였던 땅을 팔아 마련한 돈을 현 회장과의 대결 구도에 활용하려 들지에 재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릴 듯하다.
한편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해 KCC 측은 “그동안 여러 차례 밝혀왔지만 우리는 현대건설 인수전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못 박았다. 정몽진 회장의 컨소시엄 발언에 대해서도 KCC 관계자는 “확대 해석된 것 같다”고 밝혔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왕회장 땐 이곳서 인재 쑥쑥
정상영 명예회장이 최근 KCC에 매각하기로 한 용인시 마북동 102-19 일대는 과거 현대그룹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불렸던 곳이다. 이곳엔 정 명예회장 명의 부동산 외에도 KCC금강고려중앙연구소를 비롯해 현대건설 기술개발원, 현대그룹 인재개발원 등 옛 현대그룹 계열 연구단지가 밀집해 있다.
원래 하이닉스 인재개발원으로 쓰이다가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인수한 건물도 이곳에 인접해 있다. 과거 ‘왕회장’으로 불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그룹 계열사들의 인재개발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 일대 땅을 대거 사들였는데 지난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으로 인한 그룹 해체 이후 범현대가 기업들이 나눠 사용해 왔다.
정 명예회장이 KCC에 넘기게 된 마북동 102-19와 맞붙은 102-22 소재 토지는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계열인 현대증권이 소유하고 있다. 과거 경영권 분쟁으로 등을 돌린 KCC와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다시 한 번 대결구도를 그릴지도 모르는 가운데 왕회장 추억이 서린 마북동에선 아직까지 땅을 맞댄 이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