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득 의원(왼쪽)과 유명환 전 장관. 정치권 주변에서는 유명환 전 장관의 낙마가 ‘사찰정국’ 여론전환용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누가 뭐래도 이명박-이상득 형제는 끝까지 함께 갈 것이다.”
정권 출범 이후 여권 내에서 이상득 의원을 향한 공세가 불거질 때면 어김없이 이와 같은 말이 청와대 고위관계자들로부터 흘러나왔다. 2008년 ‘권력사유화 파동’과 2009년 ‘2선 후퇴’ 등 여러 차례 고비를 겪으면서도 이 의원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밑바탕에 이러한 이 대통령 신뢰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집권 후반기에 단행된 청와대 인적개편 및 8·8개각에서도 이 의원은 이 대통령과 ‘핫라인’을 구축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총리실 민간인 사찰 의혹과 비선라인 보고로 논란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원 입지가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으로 풀이됐다. 정치권에서는 “역시 이상득”이라는 얘기가 들리기도 했다.
반면, 이 의원과 대척점에 서 있던 소장파들은 ‘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정권 초부터 권력 주변을 맴돌아야 했다. ‘2선 퇴진론’ ‘인사 전횡’ 등을 내세워 몇 차례 ‘형님 권력’에 맞섰지만 이명박 대통령이란 벽에 번번이 가로막히곤 했다. 지난 7월 초 국무총리실 공직윤리관실의 민간인 사찰 파문이 불거지자 정두언 남경필 정태근 등 이른바 ‘사찰 3인방’으로 불리는 소장파 의원들은 비선라인의 보고 의혹 등을 제기하며 이 의원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자신들이 사찰의 피해 당사자라 분노가 컸던 데다 이 의원 세력에 반격을 노릴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화력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장파는 ‘형님’ 세력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박영준 차관 측근으로 불리는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이 구속되고 정인철 전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해임됐지만 소장파가 핵심 타깃으로 삼았던 박 차관과 이 의원은 그 파워가 오히려 더 공고해지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박 차관은 8월 13일 국무총리실에서 지식경제부로 자리를 옮기며 소장파의 ‘전면사퇴’ 요구를 무색케 한 바 있다.
하지만 청와대도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당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사태를 파악해본 결과 못 들은 척한다고 해결될 성격이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소장파도 나름대로 비장의 무기가 있어서 싸움을 건 것 아니겠느냐. 화해를 포함한 적절한 대응책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회의를 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소장파는 이 대통령이 또 다시 ‘형님’ 손을 들어줄 기미가 보이자 공세 수위를 높였다. 정태근 의원은 지난 8월 31일 당 연찬회에서 “국정원이 내 부인을 불법적으로 사찰했고, 그 사실을 이상득 의원이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자리에서 정두언 최고위원도 “영감(이상득 의원)이 자리에 있잖아. 열 받아. 압력 주는 것도 아니고…”라며 이 의원을 겨냥했다.
특히 소장파들은 10월 4일 국감에서 이 의원 세력과 관련된 X 파일들을 폭로하기 위해 7월 말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도권의 한 친이계 의원은 “이 의원과 그의 측근들 관련 비리 (의혹) 내용은 정권 초부터 꾸준히 확보를 해오고 있었는데 민간인 사찰 사건 이후 구체적인 물증을 찾는 데 주력했다. 어차피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고, 분명 저 쪽(이 의원 측)에서는 사정기관을 동원해 우리 치부를 파헤칠 가능성이 크다.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던 것”이라고 털어놨다. 소장파가 모으고 있다는 ‘X파일’들 중 상당수는 ‘왕차관’ 박영준 차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의 친이 의원은 “박 차관과 한 공기업 간 유착설을 집중적으로 확인 중이다. 이밖에도 여러 건이 더 있다”면서 “이렇게 이름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니 박 차관이 실세는 맞는 것 같다”고 비꼬기도 했다.
사찰 정국이 터진 후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 ‘물 타기 작전’을 구상했던 것도 이러한 소장파의 강경한 입장을 무조건 억누르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맞불’을 놓을 수도 있다. 우리라고 소장파에 대한 ‘파일’이 없겠느냐. 다만 그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자제하고 있을 뿐”이라면서 “대신 이 의원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심했다”고 전했다. 이 의원 측은 소장파가 국감 등을 통해 ‘언론플레이’를 할 경우를 염려 중인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를 계기로 ‘형님 권력’에 대한 비난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의원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 보좌관은 “이 의원 이름이 나오면 우리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2선 후퇴를 한 것인데…. 박 차관이 자원외교에 집중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면서 “일단은 특임장관이나 정무수석 등이 나서서 소장파와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도 안 되면 적어도 이 의원이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와 관련, <일요신문>은 지난 8월 중순경 박영준 차관 등과 가까운 여권 인사 A 씨로부터 가칭 ‘형님 구하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검토 중이란 말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A 씨는 대선 캠프 출신으로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권 내에서는 ‘전략가’로 통하는 인물이다. 당시 A 씨는 “소장파들과 감정의 골이 너무 깊다. 방법이 없다. 국감이 큰일인데…. 이슈를 다른 곳으로 돌려 이 의원에게 집중될지 모를 여론의 화살을 분산시키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사회적 이슈를 전략적으로 터트릴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이어 A 씨는 “아무개 장관의 친인척이 연루된 도덕적 문제, 사정기관 수장 비리 등을 관심 깊게 보고 있고, 확인만 되면 공개할 것이다. 충분히 폭발력이 있는 것들이다. 몇몇 사안이 더 있는데 일단 반응을 본 다음에 다음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보름 뒤 유명환 전 장관 딸이 외교부에 특혜로 취업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 파장은 거셌다. 8·8개각에서도 살아남았던 유 전 장관은 이 사태로 결국 물러났다. 또한 전윤철 전 감사원장 등 다른 유명인사 자녀의 특별 채용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됐다. 국회는 유명환 전 장관, 전윤철 전 감사원장 등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해 채용과정을 집중적으로 규명할 예정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A 씨가 8월 중순에 언급했던 ‘아무개’ 장관이 바로 유 전 장관이라는 것이다. 당시 A 씨는 “유 전 장관이 딸로 인해 골치 좀 썩을 것이다. 아직 (채용이) 확정되진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단 제보를 받았다. 1차 공고에서 지원자를 다 떨어트렸는데 뭔가 석연치 않다”고 언급했었다.
또한 A 씨는 “청와대가 적극 보조를 맞추는 게 효과가 클 것”이라고도 했는데 이번 ‘유명환 사태’를 지켜보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딸과 관련된 내용이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후 유 전 장관은 “정상적인 채용 절차였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편, 딸을 자진 사퇴시키며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청와대의 반응은 처음부터 싸늘했다. 이 대통령은 “장관은 냉정할 정도로 엄격해야 한다.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며 강한 어조로 유 전 장관을 압박했다. 행정안전부는 신속하게 특별감사에 들어가 채용과정에 특혜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결국 유 전 장관은 이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불명예 퇴진을 해야만 했다.
최근 기자와 다시 만난 A 씨는 “유 전 장관 딸 특혜는 이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천명한 ‘공정한 사회’ 취지에 어긋난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세게 나갈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있다. 우리가 염두에 뒀던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이 의원 얘기는 쑥 들어가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한편, 유 전 장관 파문이 한창이던 지난 9월 6일 국정원에서는 주목할 만한 인사가 이뤄졌다. 이 의원 최측근으로 꼽히는 김주성 기조실장이 물러난 것.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형님’의 힘이 약화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지만 실상은 조금 다른 듯하다. A 씨는 “소장파가 국정원의 불법사찰 의혹을 제기할 것으로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김 전 실장 교체설이 나왔다. 이 의원에게 불똥의 튀는 것을 막기 위한 인사”라고 단언했다. A 씨는 지난 8월 중순 “이 의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쉽지만 청와대나 국정원에 있는 몇몇 인사들은 옷을 벗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내비친 바 있다.
그동안 사찰의 부당함을 지적해왔던 소장파 정태근 의원 측은 이번 국정원 인사 등을 놓고 “사람이 물러난다고 혐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꼭 진실을 밝혀낼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소장파 인사는 유 전 장관의 딸 문제가 여론전환용으로 활용됐다는 의문에 대해 “이미 이전부터 딸 채용 문제가 거론된 것으로 아는데 개각 당시 스크린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의심을 가질 만한 정황은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상득 의원계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일부에서 ‘형님 구하기’ 운운한 것은 향후 사찰 파문이 무분별하게 비화될 것을 염려해 꺼낸 얘기일 것”이라며 “뒤늦게 문제가 발견된 유 전 장관 건이나 정상적으로 이뤄진 국정원 인사를 이 의원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고 반박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