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일로 예정돼 있던 현대차그룹 출범 10주년 기념식이 무기한 연기돼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미국 현대·기아차 생산기지를 점검 중인 정몽구 회장. |
지난 2000년 9월 1일은 공정거래위원회가 현대그룹에서 현대차그룹이 계열분리된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날이다. 현대차그룹은 계열분리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일 양재동 사옥에 모여 대대적인 행사를 갖고 향후 10년에 대한 새 비전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1일 오전 기념식이 돌연 취소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당초 현대차그룹은 이번 기념식을 통해 10년 만에 매출 100조 원 시대를 눈앞에 둔 그룹의 성장사를 크게 과시할 참이었다. 계열분리 이후 삼성그룹에 이은 국내 재계 서열 2위로 성장한 현대차그룹의 10주년 생일잔치를 위해 지난 2개월 동안 수십억 원을 들여 이번 행사를 준비해온 실무자들의 허탈감이 제법 컸다고 알려진다.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이번 행사를 진두지휘해온 것으로 전해져 정 회장의 갑작스러운 ‘무기한 연기’ 결정 배경에 많은 관심이 쏠리게 됐다.
재계 일각에선 현대차가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행사를 취소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정부는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강조하면서 대기업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여왔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자칫 10주년 행사가 ‘현대차만 잘나간다’는 식으로 비칠 것을 우려해 현대차에서 행사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는 관측이 대두되는 것이다.
항간에선 정몽구 회장의 건강악화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총수가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에 수개월간 준비해온 행사를 불가피하게 미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논리다. 이와 관련해 지난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국제협력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양승석 현대차 사장은 기자들과 만나 “(정몽구) 회장님 건강엔 전혀 문제가 없다”며 “어제(1일)도 평소와 같이 오전 6시에 본사로 출근해 정상적으로 업무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2개월 전부터 이 행사를 준비해왔다. 그런데 준비 과정이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개월 전 당시 이번 행사명은 ‘현대차그룹 독립 10주년’이란 이름으로 기획됐다고 한다. 그런데 정 회장 지시로 인해 ‘독립’이란 단어가 ‘출범’으로 교체됐다고 전해진다.
이후로 이번 행사는 정의선 부회장 주도로 진행되면서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되는 듯했으나 행사 전날 오후부터 “취소될 수 있다”는 소문이 그룹 내에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정 회장이 행사 당일 새벽 직접 행사 취소를 지시해 지난 2개월간의 준비가 무색하게 됐다.
그룹 안팎에 따르면 정 회장이 ‘10주년’이란 문구에도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현대가의 장자인 정 회장이 스스로를 적통으로 여기는데 ‘10주년’이란 표현은 ‘분가’해 나온 기업이란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정 회장이 못마땅해 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이) 1일 본사로 출근했다”는 양승석 사장의 말과 달리 정 회장은 1일 새벽 행사 취소를 지시한 뒤 양재동 본사로 출근하지 않고 당진의 현대제철 영빈관으로 곧장 향했다는 소문도 전해진다.
‘계열분리’나 ‘10주년’ 같은 표현에 대한 정 회장의 불편한 심기는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대건설 매각과 맞물려 묘한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동안 재계에선 현대건설 인수가 곧 범현대가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길로 비쳐왔다. 현대건설은 ‘왕회장’으로 불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 창업의 모태가 된 곳이다. 정몽구 회장의 동생 고 정몽헌 회장 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를 통해 왕회장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피력해왔다. 이는 현대중공업 최대주주 정몽준 의원 등 현대가 인사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현대차가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드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판세의 무게 추가 현대차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이 채권은행단으로부터 재무구조 개선약정(재무약정) 대상으로 선정되고 신규 여신 중단 조치를 당하면서 재계와 금융권에선 현대차가 현대건설 인수전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현대차 주변에선 현대건설 인수전 판세가 정 회장의 1일 행사 취소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 보기도 한다. 복수의 재계 관계자들은 “9월 1일은 현대차의 계열분리 기념일인데 정 회장이 이 기념식을 취소한 것은 현대그룹으로부터 현대차가 독립했다는 의미를 넘어 더 큰 그림을 보여주려는 것”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일각에선 정 회장이 이번 기념식을 현대건설 인수를 사실상 성사시킨 이후로 미루고 싶어 할 것으로 관측되기도 한다. 현대건설 채권단은 오는 24일 매각 공고를 내기로 한 상태다. 10월 중 인수의향서(LOI) 접수에 이어 빠르면 11월께 본입찰을 통해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만약 현대차가 현대그룹을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될 경우 이를 자축하는 뜻을 보태 더 큰 의미의 기념행사를 올 연말에 치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경우 현대차의 10주년 축하 행사는 계열분리에 대한 기념 차원을 넘어 현대건설과 함께 왕회장 정통성을 계승하는 ‘현대왕국’ 부활을 자축하는 행사로 커질 수 있다.
▲ 정의선 부회장. |
그러나 정 회장 의중이 현대건설 인수 성사 이후 기념행사 개최 쪽으로 향하고 있다면 이는 ‘정주영-정몽구-정의선’ 3대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독립 10주년’에 ‘현대건설 인수를 통한 정통성 계승’이라는 커다란 타이틀을 더해 황태자에게 경영권 승계 명분으로 안겨주려는 의도로 비치는 것이다. 현대건설 인수전에 정의선 부회장이 적극 나설 것이란 관측 역시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지난 7일 현대차그룹이 발표한 정성은 기아차 부회장 경질도 정몽구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 성사 이후로 기념행사를 미루고 있다는 관측에 무게를 더해준다. 정성은 부회장은 쏘울 쏘렌토 모하비 K7, 4개 차종이 미국과 브라질 등에서 동시에 리콜에 들어간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 3일 물러났다.
기아차는 최근 들어 국내에서 현대차의 아성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고 해외에서도 실적 호조를 보여 왔다. 이런 까닭에 재계에선 정성은 부회장의 즉각적인 경질 배경이 단순히 기아차 리콜 사태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보진 않는 분위기다.
리콜 사태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정 회장 머릿속엔 아들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안정적인 승계구도를 위한 대대적인 세대교체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을 거란 관측이 더해진다. 리콜 사태는 1948년생인 정성은 부회장의 조기 경질 명분을 정 회장에게 쥐어준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MK 1세대’로 불려온 60대 CEO(최고경영자)들이 대거 교체될 것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현대차 주변에선 올 연말 그룹 정기 임원 인사를 10월이나 11월로 당길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는 정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와 임원진 세대교체를 이룬 후에 정의선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10주년 기념행사를 연말에 개최할 가능성으로도 연결된다. 지난 1일 행사를 갑작스레 취소한 정 회장의 머릿속에 ‘정의선 시대’를 염두에 둔 현대건설 인수와 세대교체형 인사 밑그림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 재계의 시선이 현대차그룹으로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이미 현대차로 기우뚱?
지난 5일 현대건설 채권단이 현대건설 매각공고를 당초 예정된 10월 초에서 9월 24일로 앞당기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이미 오래 전부터 현대건설 인수 의향을 밝혀온 현대그룹과 최근 인수전 참여를 기정사실화한 현대차그룹 간 경쟁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재계와 금융권 일각에선 매각일정 변경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미칠 영향을 주시하고 있다. 현대그룹 측은 부인하고 있지만 재계와 금융권엔 현대그룹 주력사인 현대상선 등의 유상증자를 통해 현대그룹이 자금을 조달할 것이란 관측이 퍼져 있는 상태.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 수급이 보통 수개월 걸리는 터라 매각일정을 당김으로써 현대그룹이 이래저래 더 불리한 상황을 맞이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4월 현대그룹 채권은행단은 현대그룹에 대한 재무약정 체결을 결정한 상태다. 이후 현대그룹이 주거래은행 교체 불사를 외치며 강경대응으로 나오자 채권은행단은 신규 여신 중단 카드로 맞받아치면서 양측의 갈등은 깊어만 가고 있다.
그런데 현대그룹의 재무약정 선정을 이끈 주거래은행 외환은행은 현대건설 지분 8.72%를 보유한 현대건설의 주채권은행이다. 아울러 외환은행은 현대차그룹의 주거래은행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항간에는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를 저지하려는 시나리오가 있다’는 미확인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현대그룹보다 자금 동원 면에서 앞서는 현대차에 현대건설을 매각하는 것이 채권단 입장에서 더 좋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동안 현대차와 현대건설 채권단이 맺어온 ‘거래’ 또한 외환은행을 비롯한 현대건설 채권단이 현대그룹보다 현대차그룹에 더 우호적일 거란 관측에 무게를 실어주기도 한다. 지난 2000년 11월 현대차가 사들인 서울 서초구 양재동 사옥 등기부엔 여러 건의 근저당권 설정(담보 대출) 내역이 기재돼 있다. 그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근저당권 설정은 총 4건. 모두 현대건설 채권은행들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양재동 사옥 매입 직후인 2001년 2월 1일 현대차는 사옥을 담보로 채권최고액을 68억 4710만 원으로 하는 근저당권 설정 계약을 외환은행과 맺었다. 그리고 2008년 1월 8일 채권최고액 11억 8261만여 원의 근저당권 설정을 외환은행과 추가로 체결했다. 현대차가 양재동 사옥을 담보로 총 채권최고액 80억 2971만여 원의 채무 관계를 외환은행과 맺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는 현대건설 채권단에 포함돼 있는 신한은행과도 양재동 사옥을 담보로 한 채무 관계를 갖고 있다. 현대차는 양재동 사옥을 담보로 2001년 2월 8일 옛 조흥은행과 67억 1580만 원을 채권최고액으로 하는 근저당권 설정 계약을 맺었다. 이후 2003년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에 인수·합병됐다. 지난 2008년 1월 2일엔 신한은행과 채권최고액 11억 6087만여 원의 근저당권 설정이 추가로 맺어졌다. 총 채권최고액 78억 7667만여 원의 채무 계약이 양재동 사옥을 담보로 현대차와 신한은행 간에 체결돼 있는 상태다.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현대건설 등이 공동보유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등기부에도 현대차가 현대건설 채권은행들과 담보 대출 계약을 맺은 기록이 나와 있다. 현대차는 현대차 명의 계동 사옥 지분을 담보로 지난 2001년 12월 28일 외환은행과 채권최고액 90억 3216만여 원의 근저당권 설정 계약을 맺었다. 지난해 12월 30일엔 계동 사옥 담보를 통해 신한은행과 채권최고액 34억 1123만여 원의 근저당권 설정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건설도 자사 명의 계동 사옥 지분을 담보로 삼아 2002년 3월 15일 외환은행과 채권최고액 1000억 원의 근저당권 설정 계약을 맺은 점 또한 눈에 띈다.
반면 현대그룹이 2008년 10월 31일 매입해 사용하고 있는 종로구 연지동 사옥엔 별다른 담보 대출 기록이 없다. 여의도에 있는 현대증권 빌딩 등기부에도 근저당권 설정 내역은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