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열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환한 얼굴로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러한 여권의 대권 구도 변화를 직감한 박 전 대표도 이에 호응하며 적극적인 당 접수 전략을 펴고 있다. 그는 한나라당의 명실상부한 초계파 대권 후보가 되기 위해 ‘경쟁과 복속’의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친박그룹에게는 김무성(원내대표)이라는 좌장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수평적 관계를 고리로 한 자파 의원들 간 경쟁 유도 체제로 대체하고 있다. 친이계에 대해서는 수직적 관계를 전제로 ‘월박해서 충성하는 사람은 인정해주겠다’는 복속전략을 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포스트 8·21’ 대권 전략을 들여다봤다.
친박계는 최근 박근혜 전 대표와 친이 직계의원 3인의 회동을 대권가도의 터닝 포인트로 볼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친이계는 세종시 전투 때만 해도 “계파수장의 대권욕에 의한 저항”이라며 박 전 대표를 향해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시 전쟁과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며 힘이 빠져 버린 친이계는 정치적 타협 가능성 타진을 구실로 ‘미래권력’ 박근혜를 향해 은근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양측의 식사모임은 은은한 친이계 시선의 구체적 결과물인 셈이다.
상당수 친이계 인사들이 이렇게 급격하게 박 전 대표를 받아들인 배경에는 자파 내분의 후유증이 컸다. 박 전 대표 비토론이 강할 때만 해도 친이계는 “끝까지 뭉친다. 안 되면 후보 단일화를 해서라도 박 전 대표를 이길 것”이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김태호 전 총리 후보자 청문회를 거치면서 친이계 단일대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특히 김 전 후보자를 지키려는 이 대통령의 ‘령’이 먹히지 않으면서 친이계는 급격하게 분열하는 모습을 노정했다.
친이계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청와대가 총리 후보에 대해 자신감을 보이며 비밀에 부치자 솔직히 기대가 컸다. 언론도 세대교체 기수로 김 전 후보자를 띄우자 ‘뭔가 일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김 전 후보자가 맥없이 나가떨어지자, 그를 띄우는 데 올인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 많이 떨어졌다. 친이계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지만, 검증이 안 되고 겉만 번지르르한 후보를 내세운 이 대통령의 판단력과 정치력에 불안과 불만이 쌓였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에 대한 불안감은 친이계 의원들을 ‘각자도생’하는 쪽으로 몰아넣고 있다. 청와대를 지지하는 여당 지도부의 나경원 정두언 최고위원마저 김 전 후보자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것은 수도권 의원 전체의 총선에 대한 불안감이 얼마나 큰지를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한 친박 의원은 이에 대해 “4년마다 지역구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의원들은 항상 누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유리한가를 먼저 따진다. 살기 위한 투쟁이다. 이번 김 전 후보자 청문회에서 여당 최고위원들조차 돌아선 것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김 전 후보자 청문회는 친이계가 ‘우리를 막아줄 보호막은 이 대통령이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던 중대한 터닝 포인트였던 셈이다”라고 말했다.
친이계의 ‘마지막’ 희망인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좀처럼 뜨지 못하는 것도 박 전 대표의 공간을 열어주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실시된 디오피니언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표는 30.5%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2위로 지목된 오세훈 서울시장(10.2%)과도 20%포인트나 차이가 나는 압도적 지지율이다. 김 지사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8.5%)보다도 낮은 4위(8.2%)에 랭크됐다. 친이계는 대권에 보다 적극적이고 코드도 맞는 김 지사가 오 시장조차도 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답답함과 함께 조급증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친이계가 대통령 레임덕을 아랑곳하지 않는 내분과 정치적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파 대권 후보의 지지율 지지부진에 따른 조급함을 노정하며 떨고 있을 때, 박근혜 전 대표는 자신의 대권 활동 반경을 야금야금 넓혀가고 있다. 특히 친이계의 침체에 따른 대권 지형 변화를 감지한 박 전 대표는 최근 들어 더욱 적극적인 집권 전략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친박계 의원들 간에는 수평적 관계를 전제로 한 경쟁체제를, 친이계 의원들에게는 수직적 관계를 통한 복속이라는 전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8·21 회동 이후 달라진 박 전 대표의 ‘뉴 대권 플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수평적 관계를 고리로, 친박계 의원들의 경쟁 유도를 통한 자파의 경쟁력 제고와 결속력 강화 전략을 보자. 친박계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최근 달라진 친박그룹의 경쟁 분위기를 예로 들며 박 전 대표의 새로운 대권 전략을 넌지시 내비쳤다. 이 관계자는 “요즘 박 전 대표를 둘러싼 장애물이 차츰 없어지면서 친박계 의원들도 신이 나서 열심히 하려고 한다. 특히 예전처럼 좌장(김무성 원내대표)이 있어 박 전 대표와의 접촉에 어려움이 있을 때와는 달리, 누구나 박 전 대표와 일대일로 소통이 가능한 구조가 돼 더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의원들 개개인이 직접 박 전 대표에게 인물을 추천할 수 있고, 정책도 건의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되면서 친박 의원들끼리 보이지 않는 치열한 물밑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구조는 예전보다 보안유지가 더 잘 되고, 각자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조직 경쟁력도 강화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계파 결속력을 위해서도 수평적 관계 형성이 박 전 대표에게 중요하다. 친박계는 세종시 정국 과정에서 김무성이라는 좌장이 빠져나가면서 내분 조짐마저 드러내며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김 원내대표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의원도 있었고, 친박계에서도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그를 과감하게 내치며 친박계를 직할체제로 바꿔 계파 결속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앞서의 관계자는 이에 대해 “김무성 의원이 있을 때만 해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좌장이 박 전 대표와 의원들 간의 창구 역할을 하며 이견을 조율해 나갔다. 이는 친이계와 맹렬한 전투를 할 때는 효과적인 시스템이기도 했다. 박 전 대표가 전투에 나서서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하지만 김 의원이 빠져나간 뒤 박 전 대표는 그 누구에게도 예전 김 의원의 역할을 주지 않는다. 박 전 대표는 계파의 장악과 결속력을 위해 대선후보 경선 때까지 계속 좌장 없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반면 친이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직적 관계를 요구하며 친박계로 복속시키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최근 흘러나오는 친이계의 ‘월박’ 움직임과 관련이 깊다. 최근 친이계 일부는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보험’ 차원에서 친박 진영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더구나 친이 직계들마저 박 전 대표와 우호적인 관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박 전 대표가 ‘넘어오는’ 의원들을 무원칙하게 받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먼저 기득권을 주장하는 친박계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18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벌어졌던 친이계의 ‘학살’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물어야 한다. 더구나 ‘월박’ 인사들은 한때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다가 돌아섰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들에 대한 신뢰도도 높지 않다. 이런 ‘벽’을 깨기 위해서는 수직적 관계를 전제로 한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해야만 한다. 박 전 대표로서는 ‘월박’하는 친이 의원들에게 수직적 관계를 요구하며 완전한 ‘친박 DNA’를 주입시켜야 하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철저한 복속 전략이 필수적이다.
친이계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친 이재오계인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최근 박 전 대표와의 모임에 참석해 적극적인 친분을 쌓으려는 노력을 보였고, 그동안 공성진 차명진 의원 등 일부 강경파들도 박 전 대표에 대해 험악한 말을 자제하고 있다. 물론 이 대통령의 ‘령’도 있었겠지만 차기를 걱정해야 하는 그들도 어느 정도 분위기를 감지하고 박 전 대표에 대한 ‘묻지마 반대’는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기류 때문에 앞으로 친이계의 월박 움직임은 ‘화해’라는 이름 아래 가시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때 박 전 대표도 무조건적 영입보다는 친박 내부 기준에 의한 선별 복속을 해야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박근혜 전 대표의 광폭행보는 다분히 의도된 ‘즐거운’ 대권 전략의 일환이다. 하지만 이런 고무적인 상황은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 제풀에 지친 친이계의 침체에 따른 반사이익의 성격이 짙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꺼내든 ‘친박 경쟁과 친이 복속’이라는 뉴 대권 플랜은 취약점을 상쇄할 수 있는 ‘박근혜만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주군 퇴로 확보’ 이재오 그가?
▲ 지하철로 출근하는 이재오 특임장관. 유장훈 기자 |
그런데 ‘월박’ 명단을 가정할 때 먼저 눈에 띄는 그룹은 친이계 중도파 및 이상득계다. 최근 나경원 최고위원은 자신이 직접 박 전 대표와의 여성의원 모임을 추진하며 미래의 ‘주군’이 될 수도 있는 사람에게 점수를 많이 땄다는 후문이다. 친 이상득계는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 뒤 안전판 확보를 위해서라도 월박에 더욱 적극적일 것이다.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는 앞으로 이재오 특임장관이 월박의 선두주가 될 파격적인 시나리오도 예상하고 있다. 그는 최근 친박계 김영선 이혜훈 구상찬 의원 등 3인과 오찬회동을 가져 화제가 됐다. 이 장관은 이 자리에서 “당내 화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 화합을 바탕으로 정권재창출을 하자”고 친이-친박 갈등 해소를 강조했고, 참석 의원들도 이 장관의 말에 원론적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임장관의 통상적 활동이긴 하지만 여기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깊다.
친박의 한 핵심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장관이 계속 ‘악당정치’만 할 수 없지 않느냐. 이명박 대통령은 물러나겠지만 그는 계속 정치할 욕심이 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가 우리 편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재오 장관을 오랫동안 지켜본 한나라당의 한 보좌관은 이에 대해 “이 장관은 이번에 어렵게 재기에 성공했다. 천금 같은 기회를 이명박 대통령에게만 올인할 정도로 그가 우직하지는 않다고 본다. 민중당에서 민자당으로 백팔십도 다른 선택을 해 1996년 여의도에 ‘편하게’ 입성한 것만 봐도 모르겠느냐. 내가 아는 한 이 장관은 명분과 정치적 의리보다는 실리와 기회를 따르는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의 월박 가능성은 개헌에 대한 그의 스탠스가 적극 추진에서 관망 쪽으로 돌아설 조짐이 보이면서도 감지되고 있다. 또한 이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인 이 장관이 ‘주군’의 ‘퇴로 확보’를 명분으로 전격적인 월박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박근혜 죽이기’의 선봉장이었던 이재오 장관이 월박 명단에 오르는 것 자체가 여당의 권력 분화와 갈등, 그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