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 연휴 전날인 지난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제40차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임태희 대통령실장, 정진석 정무수석, 현인택 통일부 장관, 백용호 정책실장 등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그럼에도 청와대는 ‘공정사회론’을 집권 후반기 주요 국정목표로 삼고 밀어붙일 태세다. 김태호 전 총리 후보자와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여론’에 따라 전격 ‘처리’된 것도 이 대통령이 던진 공정사회 기준에 스스로 따르려는 의지로 읽힌다. 이런 불도저식 추진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차기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여권의 야심찬 정권 재창출 프로젝트’라는 해석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공정사회론을 대선까지 일관되게 추진할 경우 이미 여권과의 프레임 전쟁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야당이 고전할 가능성도 있다. ‘공정한 사회’의 장막 뒤에 숨은 이명박 대통령의 진짜 노림수를 따라가 봤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론을 처음 제기했을 때만 해도 정치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주제가 익히 정치권에서 회자되던 케케묵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에서는 ‘좋은 말만 다 갖다 붙일 수 있는 레토릭 비빔밥’이란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자율과 책임, 친 서민,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등의 국정철학을 강조했는데, ‘공정한 사회’는 그 재료들을 모두 섞어 만든 비빔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던 공정사회론은 갑자기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김태호 전 총리 후보자를 비롯해 2명의 장관 후보자가 ‘공정’ 바람에 전격적으로 날아가 버렸다. 온갖 구설수에도 꿋꿋이 버티던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도 딸 특채의 비밀이 드러나자마자 변변한 이임식도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여권의 실력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총리에 지명된 김황식 후보자도 ‘공정한 사회’의 맞춤형 인물로 통한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흐름은 공정사회론이 대통령의 경축사를 빛내기 위해 참모들이 대충 만든 레토릭 비빔밥이 아니라 교묘하고 정교한 정치적 노림수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공정사회론은 여권 역학구도가 변하면서 만들어진 ‘신주류’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전력투구가 예상된다. 이번 공정론은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주도한 개념이라는 게 정설로 통한다. 임 실장은 2008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시절부터 각종 강연 등을 통해 ‘자율과 공정’ 등을 입버릇처럼 강조했고, 결국 그 마지막 열매가 이번 8·15 경축사를 통해 맺어졌다. 그는 공정론을 처음 제안했고 경축사 작성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백용호 정책실장과 정진석 정무수석, 홍상표 홍보수석, 김두우 기획관리실장 등이 적극 동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거듭된 회의를 통해 이 대통령의 ‘평소’ 국정철학을 ‘공정한 사회’라는 새로운 용어로 재탄생시켰던 것이다. 김두우 실장은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한 사회’는 구호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실생활과 닿아 있는 정책으로 표현될 것이다.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서민희망예산이 1탄이다. 지금은 좌우에서 갸웃거리지만 연말쯤 되면 고개를 끄덕이게 할 자신이 있다”라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공정사회론 잉태 과정에서 여당은 철저히 소외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청 협의를 배제하고 청와대 실세들이 대거 투입돼 만들어진 공정사회론은 오로지 이명박 대통령의 ‘보위’를 위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당연히 참모들의 최대 관심사는 국정 주도권 유지와 ‘대통령의 레임덕 방지’였다. 청와대 정무라인에 밝은 여권의 한 고위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청와대는 세종시 정국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노정했고, 지방선거 패배까지 덮치자 국정 동력 상실을 크게 우려했다. 제2의 세종시 정국 조성을 해 국정 주도권을 되찾지 않으면, 이 대통령은 임기 절반을 남기고 레임덕에 곧바로 진입해야 하는 사상초유의 상황이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청와대의 새로운 참모들도 안일한 대책으로는 수습이 안 된다고 봤다. 뭔가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권에게도 출혈이 예상되지만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진보 진영의 의제인 공정사회론을 기획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공정론은 일단 초반에 그 약발이 먹히고 있는 분위기다. ‘친 서민 정책’에 이어 ‘공정한 사회’라는 비전으로 집권 후반기 기선 제압에 일단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도 40%대를 상회하며(추석 직전 리얼미터 여론조사 42.5%)로 안정적 지지층을 확보하자 공정론이 레임덕 방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정국이 지난 세종시 전쟁 때처럼 ‘공정사회론’이라는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는 점은 야당에게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이에 대해 “공정사회는 사실 진보 쪽에 어울리는 화두인데 보수 정부가 이 의제를 선점해 버렸다. 진보 진영에는 씁쓸한 상황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자율과 책임, 약자 배려, 지도층의 책임과 희생,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등은 그동안 진보진영의 단골 가치와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론으로 ‘적’의 가치를 모두 자신의 우산 아래 가져옴으로써 야당의 존재감을 상실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보고 있다. 청와대 정무라인은 앞으로 공정사회론에 올인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몇 달 구호 외치다가 그만둘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정교한 기획과 콘텐츠 없이는 공정한 사회라는 다소 무덤덤한 정책을 계속 끌고 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공정론을 이명박 정권이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할 핵심 목표로 설정하고 꾸준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이런 ‘꾸준한 목표 지향’은 또 다른 정치적 노림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공정사회 구호는 2012년 총선과 대선 프레임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공정한 사회’가 정권 재창출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청와대 참모들을 웬만해선 바꾸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로 볼 때 지금의 인적 시스템이 총선과 대선 직전까지 기획을 담당할 것으로 본다. 특히 대선의 선거 프레임을 ‘공정론’으로 설정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된 셈”이라고 말했다.
야권이 최근 들어 공정론에 대해 강하게 맞불을 놓는 것도 여권의 정치적 의도를 ‘뒤늦게’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여권의 대권주자들이 선거 등을 통해 비교적 검증대를 자주 거친 데 비해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은 엄정한 검증무대를 거치지 않았다. 특히 여권이 인사청문회 등을 거치며 공정론의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한 것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다. 앞서의 야권 세 정치인 모두 정치권에서 오래 전부터 흘러 다니는 X파일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공정의 잣대로 파헤쳐질 경우 의외의 타격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반면 여권의 유력 주자 박근혜 전 대표는 이미 지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X파일이 대부분 노출됐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원칙’도 ‘공정한 사회’와 가치가 공유된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거의 날마다 부르짖는 공정사회론은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적’의 가치를 수용해 여권의 기득권 이미지를 상쇄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가 숨어 있다. 이는 보수층의 일본 자민당식 장기집권 전략을 벤치마킹하는 수준의 장기적 정권 재창출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