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한 장면.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마치 온라인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루머들이 쏟아지는 것처럼 조선시대 역시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저잣거리를 뜨겁게 달궜다. 조선시대 후기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린 그때 그 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봤다.
“지조를 지키려던 기생이 자살을….”
“그게 아니라니까. ‘색황 자살’ 방법을 써서 둘이 같이 죽었다 하더라니까.”
100년 전 저잣거리는 천하절색 미모로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기생 금성월이 돌연 자살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무성한 야담이 쏟아졌다. 금성월은 명문가 양반 자제들만 상대하는 고급 기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돈 많은 장사치가 돈을 앞세워 갖은 방식으로 꾀어봐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도도한 기생이었기에 그의 자살은 ‘한양 유흥가 정사사건’으로 한동안 화제가 됐다.
오늘날 연예인 스캔들만큼이나 당시엔 기생과 양반의 애정행각이 대중들의 큰 관심사였던 때였다. 항간에는 금성월이 연모하던 양반이 있었는데 그가 중대 범죄로 처형당하자 금성월이 지조를 지키기 위해 자살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한편에선 금성월이 그와 자살여행을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색황 자살법이란 술을 마신 후 문란한 성행위로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서민들은 두 사람이 제주도에서 만난 후 처지를 비관하다 이 자살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한참동안 수군거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반에 들어서며 ‘노비 신화’도 한창 유행했다. 그중에서도 노비가 주인 대신 대리시험을 쳐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문은 저잣거리의 큰 이슈였다. 사람들은 ‘초부라는 노비가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주인을 따라다니며 귀동냥으로 학문을 익혔는데 결국 책 여러 권을 다 외웠다’며 떠들어댔다. 그의 학문은 검증되지도 않았건만 순식간에 화제가 됐고 급기야 그의 주인이 과거시험에 급제한 것도 그가 대신 시험을 본 것이라는 낭설이 퍼지기도 했다. 소문이 기정사실화되다 보니 그의 주인은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될까봐 그를 내쫓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의 주인은 초부를 평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놓아줬다고 한다.
노비 중에는 심지어 양반 자제들 사이에서 ‘스타강사’로 떠오른 인물도 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성균관을 거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유일한 성공방법으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성균관 입학과 과거급제는 집안을 일으키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런데 그 성균관 옆에 사설 교육기관, 요즘으로 말하면 학원을 차린 사람이 있었다. 정학수라는 자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후반 다양한 고서에서 등장한다. 그는 본래 노비신분으로 성균관 문묘를 지키고 제사, 청소 따위의 일을 하는 자였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성균관 내부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일들을 목격하게 됐고 그곳을 벗어나 학업에 매진하고픈 사대부들의 욕구 역시 간파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엄격한 성균관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혜화동 골짜기 경치 좋은 곳에 사설 서당을 차렸고 성균관에서 일할 당시 친분을 쌓았던 학식 있는 사대부들을 초청했다. 자신처럼 신분을 벗어나 학문을 배우고픈 일반 백성들도 불러들였다. 그의 서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전성시를 이뤘고 한양의 명문 서당으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기생들을 호령하던 조선시대 ‘삐끼’들의 삶도 소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에는 ‘조방꾼’이라는 직업이 있었는데 지금의 호객꾼과 비슷했다. 명문가 자제들의 경우 밖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이 두려워 마음껏 기방을 출입할 수 없는 것이 그 시대 분위기였다. 따라서 조방꾼들은 양반집을 방문해 기방 소식을 전하고 다니며 ‘미모의 기생이 등장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상대가 흥미를 느끼면 자신이 연결해주겠다고 한 뒤 기생을 직접 양반집으로 데려오거나 은밀한 장소를 미리 섭외해 일을 치르게 하는 등 중간역할을 했다. 고객과 기생의 일이 끝날 동안 밖에서 망을 보고 잔심부름을 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과 사정을 모두 알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양반들은 그의 입막음을 하기 위해 돈뭉치를 찔러주곤 했는데 그렇게 번 돈만으로 조방꾼들은 양반 못지않은 행색을 갖추고 다녔다고 한다.
철저한 비밀유지로 고객과의 의리를 지키는 조방꾼도 있었지만 이를 역이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벙어리 방한 최 씨’와 ‘이중배’에 대한 일화는 박지원, 노신의 글에도 남겨져 있다. 그중 최 씨는 상당한 입담으로 양반들의 마음을 녹였을뿐더러 입이 상당히 무거워 ‘벙어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무거운 입 덕분에 기방 한 곳만이 아니라 한양의 관가와 사창을 휘어잡는 당대의 조방꾼으로 통했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날마다 세도가와 부잣집 자제들을 불러 모아 꽃에 취하고 버들에 드러눕게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해주니 양반은 물론 기생도 먼저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조방꾼 이중배는 반대의 경우다. 그는 양반들을 한껏 기대에 부풀게 하는 방식으로 사기를 쳤다. 그는 “오늘밤에 국색이 한 사람 나타났다. 오늘 딱 하루 동안만 그런 미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으니 비용 1000전을 장만하라”며 열 명의 양반들을 유혹했다. 1000전이면 10냥에 해당하는 돈으로 그는 하루만에 100냥을 받아 챙긴 셈이다. 당시 100냥이면 서울에서 집 두 채를 살 수 있을 만한 큰돈이었다. 열 명의 양반들은 각자 따로 약속을 정했기에 서로 눈치 채지 못했고 절색의 미녀와 밤을 보낼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그날 밤 기생이 머무르는 처소 앞에는 아홉 명의 양반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중배는 “미모가 워낙 뛰어나다보니 다른 조방꾼들이 바람같이 소식을 듣고 손님을 잔뜩 모시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양반들은 결국 기다리다 날이 새 10냥을 되돌려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