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7년 10월 김선홍 기아 회장(가운데)이 사퇴를 선언했다. 연 매출액 10조원의 거대기업의 몰락은 IMF사태의 주요 원인이 됐다. | ||
경제 현장에서 바라본 이 사태의 원인은, 누구의 책임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부실이 빚어낸 결과였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 총체적 부실이 IMF 사태로 이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있었다. 그것은 97년 7월15일 부도가 난 세칭 ‘기아 침몰’이 아닌가 싶다.
당시 기아는 재계랭킹 6~7위를 넘나드는 매머드급 자동차 기업이었다. 이 회사는 자동차 전문 기업이었음에도 현대, 대우와 함께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의 대열에 들 정도로 기술력과 마케팅력이 대단했다.
그러던 기아가 부도를 낸 것은 엄청난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매출액 10조원이 넘는 대형 기업의 침몰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에 대한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91년부터 한국 시장에 투자를 했던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시에 금융시장을 이탈, 97년 상반기만 해도 1천4백억달러에 이르던 외환보유고가 10분의 1 수준으로 텅텅 비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문제의 기아차는 왜 침몰한 것일까. 물론 이에 대해서도 해석은 여러 가지다. 내부적 원인과 외부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자가 경제현장에서 바라본 기아 침몰의 시작은 내부요인보다 외부요인이 더 컸다는 생각이다. 96년 말까지만 해도 기아의 경영상태는 1천억원대 경상이익을 낼 만큼 영업이 순조로웠다. 경영상 발생하는 비효율적인 부분이야 대다수 기업에서 흔히 일어나는 수준의 것이었고.
어쨌든 기아 침몰의 외부적 요인은 정치적 요인, 경제계와 기아차의 보이지 않는 갈등 등 많겠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컸던 부분은 삼성그룹의 승용차 시장 진출이 아니었을까 판단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삼성의 승용차 시장 진출 계획이 그룹 내부에서 처음 수립된 것은 80년대 중반이었지만, 현실화 단계에 돌입한 것은 91년 무렵이었다. 삼성이 승용차 사업 계획을 구체화하지 못한 이유는 90년 당시까지 존재했던 산업합리화법 때문이었다. 대기업의 중복투자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안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자동차, 중공업, 화학 등이 주로 해당됐다.
그러나 이 법안은 90년 들어 기업의 투자활동을 규제하는 악법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대기업의 로비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이때부터 삼성, 현대, 대우 등은 중공업, 석유화학분야에 앞다퉈 진출했다.
이즈음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취임 5주년(87년 회장 취임)인 92년에 승용차 사업 진출을 가시화한다는 계획 아래 내부적으로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했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은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현명관 당시 비서실장, 지승림 당시 기획담당 부사장, 이대원 부회장 등 실세그룹이었다. 이들은 승용차 사업 진출을 반대하던 경영인들을 축출하면서 강행을 고집했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 ||
당연히 인수 대상은 자동차 전문 회사인 기아차였다. M&A에 나설 경우 주식시장을 통해 지분을 사들일 수 있고, 기아차가 주가방어를 할 여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M&A 의도가 노출될 경우 자칫 여론의 비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면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는 게 자체 판단이었다.
이 계획은 92년 후반부터 은밀하게 진행됐다. 삼성생명 등 금융 계열사에서 시장을 통한 지분 확보에 착수하는 한편 기아에 담보대출을 해주는 등 고리를 만들기 위한 작업도 진행됐다. 물론 이 같은 움직임은 전혀 외부에서 감지할 수 없었다.
이런 삼성의 행보가 노출된 것은 93년 무렵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산업합리화법안이 폐지되고, 삼성이 자동차사업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뜬 것이다.
물론 삼성은 이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강력히 부인했다. 그런데 이즈음 터진 것이 세칭 ‘신수종사업 보고서’였다. 삼성그룹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보고서는 미래 신수종사업으로 자동차 진출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 문제가 표면화되면서, 예상대로 그동안 삼성이 물밑에서 사들였던 기아차 지분의 실체가 노출됐다. 이 부분이 노출된 것은 M&A 대상이 된 기아차의 폭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선홍 기아차 회장은 삼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판단에 따라 회장실 내부에 극비 정보팀을 전격 구성했다. 4명으로 구성된 이 정보팀의 구성원은 정치권에서 활동하던 오아무개씨를 비롯해 이아무개씨 등 그야말로 베테랑 인력이었다. 이들의 정보력은 국가정보팀 못지 않을 정도였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연일 신문지상을 통해 폭로됐고, 이에 따라 삼성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결국 삼성은 기아에 대한 M&A 야심을 일단 포기하고, 신규 진출로 방향을 틀었다. 94년 산업자원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삼성은 일본의 닛산과 기술제휴를 맺고 부산에 삼성자동차 공장을 세웠다. 물론 삼성은 과당경쟁 우려에 대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삼성차의 해외판매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신규 진출한 삼성차가 수출을 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쨌든 삼성의 승용차사업에 따른 후폭풍을 직접 맞게 된 것은 기아차였다. M&A 대상이 되자 기아차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93년 무렵에는 삼성의 승용차 진출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던 기아는 94년 삼성의 승용차 진출이 확정된 뒤 인수저지를 위한 대응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장사는 뒷전이었고, 그저 경영권 방어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었다.
이즈음 기아차는 황당한 상황에 부닥쳤다. 기아차의 최대주주였던 포드가 느닷없이 철수를 선언하고 만 것이었다. 포드의 철수는 기아차로선 기댈 언덕이 없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왜 포드가 갑자기 철수를 선언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로 인해 기아차는 서서히 침몰해갔다.
한국 경제 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기아차 사태는 결과적으로 모두 패자였다. 기아차를 인수하려던 삼성도 끝내 자동차 사업을 포기했고, 기아는 침몰했으며, 이 후유증이 IMF 사태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경제의 원리는 자유경쟁이지만 그것이 강자에게만 유리하다면 규제원리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경제력 집중현상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운 개념의 산업합리화법을 다시 제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선섭 기자